준비 안 된 황제의 너무 길었던 치세

2024-10-04

“왜구(倭寇)” 기록은 5세기 초의 광개토대왕비에도 나타나지만 역사적 현상으로서 왜구는 훨씬 후세, 14-16세기에 나타났다. 14세기에 한반도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다가 15세기에 잦아들고, 16세기에 다시 일어나 중국 동남부 연안에서 활동이 많았다. 14세기를 전후한 ‘전기 왜구’와 16세기의 ‘후기 왜구’ 사이에는 큰 성격 차이가 있다.

전기 왜구는 원나라의 일본 정벌(1274-1281)을 계기로 일어난 일본의 내부 변화가 밖으로 번져 나온 현상이었다. 그 활동 내용은 단순한 약탈이었고, 한반도와 북중국의 해안지대가 그 활동 영역이었다.

후기 왜구는 동아시아 해역 전체를 무대로 한 복합적 현상이었고 약탈보다 교역이 중심 사업이었다. 중국 동남해안이 중심 무대였고 인적 구성도 일본인보다 중국인이 더 많았다. (3 대 7 비율로 본 당시 기록들이 있다.) 기지를 일본에 두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14세기 경험의 연장선 위에서 “왜구”란 말이 계속해서 쓰인 것이다.

왜 가정제 때만(1521-1567) 왜구가 많았을까?

〈명 실록〉의 왜구 관련 기사 빈도를 조사한 연구가 있다. 7대 경제에서 11대 무종까지 72년간(1450-1521) 6개 기사가 있는데 12대 세종(가정제) 45년간(1522-1566) 601개 기사가 나타나고, 그후 13-14대 목종-신종 53년간(1567-1619) 34개로 줄어들었다.

조사된 170년 기간 중 4분의 1 남짓한 한 황제의 재위 기간에 90% 이상의 기사가 집중된 데는 그 황제의 정책에 큰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다음 황제 목종이 즉위 직후 해금(海禁)을 완화하는 ‘융경개관(隆慶開關)’을 시행하자 왜구 문제가 크게 줄어들었다.

가정제 때 왜구의 위세를 보여준 사례로 1555년의 ‘가정왜란(嘉靖倭亂)’이 있다. 수십 명 왜구가 80여 일간 장강 하류 일대를 휩쓸고 다니며 4천여 명 관병을 살상했다고 한다. 이들이 남경에 들이닥치자 1천여 명 수비대가 성문을 걸어 잠그고 이틀 동안 쩔쩔맸다고 한다.

53명 왜구가 모두 날아오는 화살을 손으로 잡아채는 무예의 고수였다느니, 민간인을 일절 침해하지 않았다느니, 신기한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공격해 온 목적이 무엇인지 등 많은 것이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가정왜란에 관한 기록이 어지러운 큰 원인이 정치가 어지러운 데 있었다. 관계자들이 책임 회피를 위해 아무렇게나 지어낸 얘기들이 여과 없이 기록에 남은 것 같다. 가정왜란 몇 해 전의 ‘경술지변(庚戌之變)’에서도 그 시대 명나라 정치의 어지러움을 알아볼 수 있다.

오랑캐는 평화를 원하는데, 명나라 조정은?

16세기에 가장 큰 몽골세력은 타타르부(韃靼部)였다. 북원(北元)의 회복을 노리던 종전의 몽골세력과 달리 타타르부는 명나라와 교역만을 원했다. 생산 품목의 범위가 좁은 유목민에게는 농경민과 교역을 통한 물자 획득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원나라처럼 중국을 지배한 것은 예외적인 현상이었다.

알탄 칸(1507-1582)은 1540년경 타타르부를 이끌기 시작하면서부터 호시(互市) 개설을 청원했다. 가정제가 1541년의 첫 청원을 무시하자 이듬해 알탄 칸이 다시 보낸 사절을 지방관들이 바로 처형했다. 나중에 보고를 받은 황제가 그 관리들을 포상하자 옹만달(翁萬達)이 잘못된 조치라고 항의했으나 그 자신이 견책당했다. 변경의 장수와 관리들은 몽골 사절 잡아 죽이기에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참다못한 알탄 칸이 1550년 군대를 끌고 오자 제대로 된 방어가 없었다. 북경성 하나만 겨우 지키면서 호시 개설을 약속해 몽골군이 회군했다. 그러나 그 약속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아 곧 적대관계로 되돌아갔다.

1570년 명나라와 알탄 칸의 화친은 멜로드라마틱한 사연으로 전해진다. 알탄 칸의 부인이 무척 사랑하는 손자가 개인적 문제로 (약혼자의 혼처를 바꾸는 데 불만을 품고) 명나라로 달아났는데 현명한 명나라 지방관이 그를 보호하며 황제에게 주청하여 알탄 칸 집안의 화해를 도와주면서 신뢰를 쌓게 했다고 한다.

이런 사연에는 별 의미가 없다고 나는 본다. 알탄 칸은 시종일관 평화로운 교역 관계를 원했고 문제 많던 황제가 없어진 덕분에 평화가 온 것일 뿐이다. (중국 황제를 대개 시호로 표시하지만 가정제만은 연호로 부른다. “세종”이란 시호가 너무 아깝다.) 명나라가 그토록 비협조적으로 나갔는데도 알탄 칸의 영도력이 오래 유지된 것이 명나라에게 천행이었다.

권력만 생각하고 책임은 생각 않는 황제

가정제의 정치가 엉망이 된 계기로 즉위 직후의 ‘대례의(大禮議)’기 흔히 지목된다. 11대 무종(武宗, 1505-1521)이 후사 없이 죽어서 사촌인 가정제가 추대되었는데, 신하들은 그가 백부인 효종(孝宗, 1487-1505)에게 (사후) 입양해 무종의 동생 자격으로 즉위하기 바랐다.

가정제가 신하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자기 생부의 추존(追尊)을 고집한 것은 얄팍한 효심 때문이었다. 생부의 권위를 더 올리고 생모가 태후 자리에 오르게 (양모가 될 기존 태후 대신) 하고 싶었던 것이다. 대학사 양정화(楊廷和)를 위시한 조정 주류는 이에 반대하다가 황제의 배척을 받고, 황제를 지지하는 총신들이 요직을 차지했다.

명나라 정치체제의 약점으로 ‘황제독재’가 흔히 지목된다. 태조 때 재상의 자리를 없애 황제권에 대한 견제를 없앤 것이 종종 정치 불안의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는 재상권보다 좀 약해도 대학사를 중심으로 조정의 역할이 지켜졌다. 그런데 가정제가 조정 주류를 배척하면서 황제독재의 폐단이 극도로 심해졌다.

그 폐단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북로(北虜) 대책을 보자. 알탄 칸의 일관된 호시 개설 청원을 무시한 것은 온건한 대책을 주장하는 주류 신하들에 대한 황제의 불신 때문이었다. 이 틈새를 간신들이 파고들어 적대적 정책으로 황제의 환심을 사다가 막상 사태가 터지자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 것이었다.

‘준비 안 된 정권’의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낸 사례다. 칼자루를 쥔 권력자가 당장은 매사를 뜻대로 몰고 갈 수 있어도 그 결과는 누가 감당하나? 서연(書筵)을 통해 황제의 권한만이 아니라 그 책임까지 몸에 익힌 황제라면 가정제 같은 난장판은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명나라의 ‘정치 실패’ 속에 포르투갈이 얻은 마카오

가정제의 북로 대책에 비해 남왜(南倭) 대책의 문제점은 확실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충분히 미루어 헤아릴 수 있다. 그가 죽은 후의 개관 정책으로 왜구 문제가 바로 잦아든 것을 봐도, 재위 중 가정왜란 등 상황에 관한 기록이 어지러운 것을 봐도, 제대로 된 대책이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정의 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시장 논리가 현장을 지배했다. 남왜 문제에는 해외교역이 걸려 있었다. 해금 정책 아래서도 해외교역은 꾸준히 자라났는데, 조정의 공식적 대응이 해금 정책으로 막혀 있는 상황에서 지방관들이 교역에 이해관계를 가진 지방 민간세력과 결탁하는 풍조가 일어났다.

명말청초의 문학작품에 아내 왕취교(王翠翹)와 함께 많이 등장한 서해(徐海)도 가정제 때 해적이었다. 서해는 중국 동남해안에 큰 세력을 이루고 있다가 1556년 총독 호종헌(胡宗憲)의 초무를 받았으나 살해되고 왕취교는 강물에 몸을 던졌다. 또 하나 거물 해적 왕직(汪直)도 호종헌의 초무에 응하다가 1559년 처형당했다.

호종헌 자신은 몇 해 후 권신 엄숭(嚴嵩)이 탄핵당할 때 일당으로 몰려 옥사했다. 소인배지만 왜구 박멸에는 공로가 있다는 후세의 평가가 있는데, 그 공로라는 것도 왜구와 관련된 이권을 생각하면 미심쩍다. 서해와 왕직을 정말로 ‘초무(招撫)’했다면 해양 방면의 질서에 공헌이 되었겠지만, 그들이 결국 살해되고 초무의 효과가 무산된 것을 보면 얄팍한 책략이었다는 의심이 든다.

포르투갈인이 마카오에 기지를 확보한 것도 가정 연간이었다. 포르투갈인은 1513년 중국 연안에 도착하고 1517년 사절을 보내고 교역 활동을 시작했으나 난폭한 행동 때문에 추방당했다. 그후 불편한 관계가 계속되다가 1554년 광주(廣州)의 지방관과 지속적 교역을 위한 협약을 맺고 1557년 마카오 임대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도 뇌물이 오고간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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