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5여 년간 인수합병(M&A) 자문 업무를 하며 주로 가치평가(valuation) 분야에서 활동해왔다. 그 과정에서 국내 최초로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의 가치평가 전문가로 지명된 것은 개인적인 영광이었고 국제회계기준 도입 과정에서 혼란이 컸던 사업결합의 공정가치 평가 정착에 기여한 것은 큰 보람이었다.
가치평가 자문을 하면서 특정 고객의 입장에서 협의된 가정하에 평가를 수행하는 업무에 비해 객관적인 평가 결과를 도출해야 하는 경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분쟁 중인 당사자 사이에서 중립적 입장을 유지하며 합리적인 결과를 제시하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가치평가의 석학’으로 불리는 미국의 애스워스 다모다란 교수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가치평가는 정밀한 가치를 찾는 객관적인 과정이 아니다”라고 언급한 것이 인상 깊었고 공감도 됐다. 기업의 상태가 시점이나 계절마다 다르고 매출과 이익의 지속성이나 성장성에 대해서는 각 사람의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결과를 도출하기 어렵다는 것이 가치평가의 본질적 한계다.
M&A 시 지나치게 높은 가격을 주고 인수한 사례를 자주 보게 된다. 과도한 인수 경쟁, 미래 사업이나 시너지 창출에 대한 과신, 불확실한 변수에 대한 부족한 고려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때로는 오너의 과욕과 독단적 결정이 독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실패 사례들은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가치평가 과정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가치평가 결과 도출 과정에서는 상황에 따른 조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상장기업 대비 유동성이 없는 비(非)상장법인의 주주가치는 할인하고 경영권을 가진 대주주에 비해 경영권이 없는 소수주주의 가치도 할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경영권 프리미엄은 경영 의사 결정권의 가치로, 주로 경영권 없이 거래되는 주식시장에서의 소액주주 거래와 경영권이 수반되는 M&A 거래 금액을 비교해 추정한다. 과거 연구에서는 그 범위를 평균 약 30% 내외로 추정했으며 PwC 분석에 따르면 전략과 사업 계획에 대한 영향력, 이사 선출 권한, 투자·배당에 대한 의사 결정 권한 등이 경영권 프리미엄 크기에 영향을 미친다.
최근 개정된 상법에 따른 이사의 주주 충실 원칙 도입이나 논의 중인 M&A 시 잔여 지분에 대한 의무 공개매수 등을 고려할 때 경영권 프리미엄 수준은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 향후 시장 거래 분석을 통해 합리적인 적용 수준이 재검토돼야 할 것이다.
금융상품이 다양해지면서 파생상품 평가 수요도 증가했다. 대표적인 파생상품인 옵션(option)은 예를 들면 지금 주식을 사는 대신 1년 후 지금 가격 혹은 10% 높은 가격에 매수할 권리를 주는 것이다. 옵션의 가치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성급한 결정보다 충분한 정보 확인 후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권리의 가치를 의미한다. 이는 금융뿐 아니라 경영과 일상에서도 중요한 통찰을 준다. 속도감 있는 추진력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기다림의 인내가 새로운 환경과 기회를 창출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인적 자산, 무형 자산 그리고 기업의 사회적 기여에 대한 측정과 공시가 새로운 관심 분야로 부상하고 있다. 사회적 가치의 측정은 다양한 방법론들이 개발돼왔으며 환경·사회·지배구조(ESG)를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함께 측정 체계가 고도화되고 있다. 이처럼 가치평가의 분야는 다양하고 개척해야 할 영역이 많다. 앞으로도 더 많은 전문가들이 가치평가를 통해 국내 자본시장 발전에 공헌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