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정희의 <유년의 뜰>은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유년부터 중년을 보낸 한국 여성의 일대기를 연작 형식으로 그린 소설집이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여덟 개 단편의 주인공이 동일 인물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별사’를 제외하고 각 단편의 주인공은 모두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지 않고, 그들이 살고 있는 연대나 거주하는 장소도 특정돼 있지 않다. 그럼에도 이 소설집이 하나의 연작소설처럼 읽히는 것은 작중 여주인공들의 경험이 6·25전쟁기부터 개발독재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한국 여성들이 어린아이에서 성인 여성이 되는 과정에서 겪는 복잡다단한 경험을 응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서 여성이 된다는 것’의 의미 탐문
<유년의 뜰>은 생애의 다른 시간대를 통과하는 여성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대결, 고통과 체념을 적확한 문체로 표현함으로써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깊이 있게 탐문하고 있는 작품이다. 오정희의 문학적 탐침이 뚫고 내려간 곳은 한국 여성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무의식이고, 그가 시도한 문체 실험은 의식화될 수 없는 여성적 무의식을 의식적 언어로 번역해 내려는 작업이다. 가부장제 사회가 지정해 준 여성의 자리에 정박해 있기를 거부하고 반역을 도모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오정희가 발견한 한국 여성의 초상화다. 이 초상화를 가장 인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작품이 <유년의 뜰>이다.
이 소설집의 첫 두 작품인 ‘유년의 뜰’과 ‘중국인 거리’는 6·25전쟁 직후 유년기와 사춘기를 보낸 한 소녀의 성장기다. 두 작품은 이 소녀가 피란지에서 보낸 한철과 항구도시로 이사한 후 보낸 한 시절을 일인칭 서술자의 관점에서 그리고 있다. 피란지 마을과 항구도시의 중국인 거리는 전통적 질서가 무너지거나 변형된 공간이다. 특히 중국인 거리는 전후 재편 중이던 한국사회의 주류 질서 속으로 진입하지 못한 주변적 존재들(피란민), 순수 혈통에 이질적 요소를 끌어들인 오염원들(양공주), 단일민족 신화에 젖어 있던 한국사회의 타자들(중국인)이 어울려 살아가는 이질 혼성공간이다.
한국 성장소설의 한 특징을 이루고 있는 아버지 부재의 상황은 두 작품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유년의 뜰’의 아버지는 집을 떠나 있고, ‘중국인 거리’의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자식의 성장을 인도한 권위를 지니고 있지 않다. 전쟁은 여성을 집 바깥으로 불러내 생존의 주체로 세우고 부권을 한낱 추문으로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 딸들이 걸어가는 성장의 길은 가부장제 사회의 전형적 여성이 되는 행로에서 빗겨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가부장제 사회가 요구하는 이른바 ‘정상적 여자’ 되기를 거부한다.
이 딸들의 성장에 결정적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는 어머니이거나 (가족 안팎의) 언니들이다. ‘유년의 뜰’에서는 어머니와 주인집 언니가, ‘중국인 거리’에서는 할머니와 매기 언니가 이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런데 이 여성들은 어린 소녀가 따라야 할 규범적 모델이 되기에는 이미 아버지의 율법 바깥으로 걸어 나간 불온한 존재들이다. 한국 가부장제에 일시적 균열이 일어난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여자아이가 걷게 될 성장의 길은 아버지의 질서에 다소곳이 안착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성장 자체가 문제시되는 일탈적이고 변칙적인 길이다. 한국 가부장제의 재편기라 할 수 있는 전후에 딸들은 적절한 성 역할 모델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이 여자아이들에게 성적 욕망이 지워진 어머니는 되고 싶은 모델이 아니다.
이런 일탈적이고 변칙적인 성장 과정에서 ‘유년의 뜰’의 일곱 살짜리 여자아이는 남자와 함께 야반도주했다가 아버지의 손에 잡혀 와 죽음을 맞는 주인집 언니(부네)의 말로를 지켜본다. 부네의 널(나무판)에 박히는 못 소리는 아버지의 금기 밖으로 튕겨 나간 딸의 비참한 운명을 확인해 준다. 이 소리를 들으면서 여자아이는 자신의 몸 가득히 “서러움 같은 욕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서러움 같은 욕정”은 모순형용이다. 일곱 살짜리 여자아이가 성적 모험을 감행했던 여자의 말로를 지켜보는 것은 서글픈 일이지만, 서글픔 속에는 욕정이 남아 있다. 끝내 없어지지 않고 잔존해 있는 욕정은 소설 마지막에 여자아이로 하여금 아버지가 돌아왔다는 교장 선생님들의 말씀을 듣고 탁자 위에 놓인 케이크 한 조각을 몰래 훔쳐 먹는 기이한 행동을 하도록 이끄는 동인이다. 그러나 아이는 먹은 것을 꾸역꾸역 토해낸다. 아이는 학교 변소간에 앉아 “다리 사이에 머리를 박고 구역질을 하며 똥통 속을 들여다”보다가 한 줄기 햇빛 속에서 “무언가 소리치며 일제히 끓어오르고” 있음을 본다. ‘햇빛 속에 투명하게 드러난 똥들의 맹렬한 반란’, 이 이미지는 오물 속에서 격렬하게 폭발하는 성적 욕망과 그 욕망을 담고 있는 여성 육체의 비루함을 동시에 포착하고 있다. 일곱 살 여자아이는 전쟁이 가져다준 대행 가장의 시대도, 전쟁의 종식과 함께 도래할 새로운 가장의 시대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억눌린 욕망을 몸으로 표현하며 유년의 시간대를 통과한다.
여성으로서 자신의 경험 비춰준 문학적 거울
‘중국인 거리’에서 아버지는 돌아왔고 화자의 가족은 피란민 마을에서 항구도시로 옮겨와 외형적으로는 평범한 가족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욕망의 외출을 감행했던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왔으며, 아버지는 오빠의 어설픈 폭정을 마감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딸들의 성장을 인도할 권위 있는 존재로 올라선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여덟 번째 아이를 임신시키는 육체적 존재일 뿐 상징적 권위를 지니고 있지 않다. 이런 환경에서 아홉 살로 접어든 여자아이는 친엄마를 계모라 부르고 의붓자식처럼 집을 나가고 싶어한다.
이 여자아이에게 미군 부대의 흑인 병사와 동거하고 있는 매기 언니는 선망의 대상이다. 친구 치옥이는 당당하게 “나는 커서 양갈보가 될 거야”라고 말하고, 화자는 그의 선언에 반대하지 않는다. “양갈보”는 어른들에게는 경멸과 수치의 존재지만 어린 소녀들에게는 미제 물건으로 상징되는 매혹적인 소비 상품과 가부장적 가족질서 안의 여자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육체적 쾌락을 향유하는 존재로 보인다. 섹슈얼리티의 모험과 소비상품에서 맛보는 쾌락은 여자아이가 “양갈보”에게서 찾아낸 새로운 가능성이다. 하지만 가능성은 곧 불가능성으로 바뀐다. 술에 취한 흑인 병사가 매기 언니를 2층 방에서 던져버린 것이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드러난 매기 언니의 시신은 이 방의 남자에게 몸을 내어준 한 여성의 참혹한 말로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먼발치에서 슬픈 시선을 던지는 중국 남자를 동경하고 몸의 근지러움을 느끼던 소녀에게 닮고 싶고 되고 싶은 여자는 없다. 소녀가 임신한 어머니에게 발견한 것은 동물성에 갇힌 여자의 몸이다. 어머니가 여덟 번째 아이를 낳았을 때 화자는 “이해할 수 없는 절망감과 막막함으로 어머니를 불렀다. 그리고 옷 속에 손을 넣어 거미줄처럼 온몸을 끈끈하게 죄고 있는 후덥덥한 열기를, 그 열기의 정체를 찾아내었다. 초조(初潮)였다.” 여성성의 육체적 지표라 할 월경을 소녀는 부정적으로 체험한다. 그것은 성적 쾌락의 신호나 생명 창조로 열린 축복이 아니라 온몸을 옥죄는 위협으로 경험된다. 바람직한 성 역할을 발견하지 못한 소녀에게 월경은 여성으로서 피할 수 없는 생물학적 질곡이다. 이 질곡을 받아들이며 소녀는 여자의 길로 접어든다.
그러나 여성성의 규범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소녀들의 몸에 길들지 않은 야생의 흔적이 남아 있다. 어른이 된 다음에도 그들은 폭발할 것 같은 긴장에 휩싸이고, 더러운 종양을 제거하듯 아이를 지운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그들은 가부장적 모성에 굴복하지 않으면서도 여자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길을 찾아 나선다. ‘옛 우물’에서 하나의 변곡점을 맞는 여성적 정체성의 탐색을 통해 우리는 ‘한국사회에서 여자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오정희 소설을 통해 우리는 여성으로서 자신의 경험을 비춰주는 문학적 거울을 얻는다. 오정희가 한국 여성문학에 안겨준 빛나는 선물이다.
<이명호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