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군계일학(群鷄一鶴)과 혜소(嵇紹)

2025-11-03

사마의(司馬懿)가 말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조조의 후예를 제압하고 위(魏)나라 전권을 장악한다. 266년,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司馬炎. 236~290)은 선양의 형식으로 황제 자리를 넘겨받고 국호를 진(晉)으로 교체했다. 이후 그는 오(吳)나라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한다. 흔히 삼국시대 최후 승자로 제갈량(諸葛亮)의 라이벌 사마의를 꼽는 이유다.

이 중국사의 혼란기에 ‘죽림칠현(竹林七賢)’이 출현해 전쟁에 지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들은 혼란스러운 군벌(軍閥) 정치를 멀리하고 죽림에 모여 주로 거문고와 술을 벗 삼아 세월을 보냈다. 혜소(嵇紹). 253~304)의 부친 혜강(嵇康. 224~263)도 산도(山濤), 왕융(王戎) 등과 함께 ‘일곱 현인’에 속한다.

이번 사자성어는 군계일학(群鷄一鶴. 무리 군, 닭 계, 하나 일, 학 학)이다. 앞 두 글자 ‘군계’는 ‘닭 무리’다. ‘일학’은 ‘한 마리 학’이다. 이 두 부분이 합쳐져, ‘닭 무리에 섞인 한 마리 학’이란 의미가 만들어졌다. ‘여럿 가운데 돋보이는 한 인물’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된다. 현재 중국에선 ‘학립계군(鶴立鷄群)’, 이렇게 많이 쓴다. ‘진서(晉書)’의 ‘혜소전(傳)’에서 유래했다. ‘진서’에는 사마염이 건국한 진(晉)나라 역사가 담겨있다.

혜강의 외아들로 태어난 혜소는 10세에 부친과 사별했다. 도교(道敎)에도 조예가 깊었던 혜강은 여러 차례의 추천이나 초빙에도 정치 참여를 완강히 거절했다. 하루는 그가 억울하게 고소당한 친구를 변호하기 위해 증인으로 나선다. 그러나 이 의로운 선택은 비극으로 끝났다. 악의를 가진 한 고위 관료가 농간을 부려 사건의 본질을 왜곡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작은 사건이었지만 차츰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대장군 사마소(司馬昭)를 격노하게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사마소는 자신의 초빙에도 벼슬을 한사코 마다하는 혜강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사마소는 사마염의 부친이다.

날벼락처럼 누명을 쓰고 허망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에 처했지만, 심지가 곧은 혜강은 최후 순간까지 초연한 태도를 견지했다.

“슬퍼하지 마라. 내가 없더라도 산도가 있으니, 너는 고아처럼 자라진 않을 것이다. 이 아비에게는 산도와 같은 훌륭한 벗들이 있단다.” 죽음을 앞두고 혜강은 어린 아들에게 절망하지 말고 학업에 정진하라며 이런 유언을 남겼다.

혜강의 벗들은 이 유언을 무겁게 받아들였다. 혜소가 방황하지 않고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이 귀한 우정의 힘 덕분인지 혜소는 반듯하게 성장했다. 고위 관료로 승진한 산도는 좋은 날을 골라 사마염에게 혜소를 천거한다. “서경(書經)에 ‘아비의 죄는 아들에게 미치지 않는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죄인 혜강의 아들이지만 혜소는 그 지혜나 총명함이 대단하니 비서랑(秘書朗)으로 기용해도 될 것입니다.” 무제(武帝) 사마염이 바로 답했다. “경이 이렇게 추천하니, 한 단계 높은 비서승(秘書丞) 일을 맡겨보겠습니다.”

혜소가 임명장을 받고 뤄양(洛陽)에 도착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이들이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오늘 가서 보니, 혜소의 모습은 마치 닭 무리 속에 우뚝 서있는 학처럼 보였습니다.” 현장의 혼잡한 인파 속에서 혜소를 직접 관찰한 어떤 이가 일부러 혜강의 절친 왕융을 찾아가서 이렇게 칭찬했다. 이 말을 듣고 왕융이 웃으며 말한다. “아마 당신은 혜강을 본 적이 없나봅니다. 그는 아들보다 더 출중한 인물이었답니다.”

성실한 자세로 공직 생활을 하던 혜소는 안타깝게도 궁정 암투 현장에서 온몸에 화살을 맞고 51세에 세상을 하직했다. 백치(白痴) 황제 사마충(司馬衷)을 살리기 위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갑옷도 두르지 않은 문관의 몸으로 막아내다 희생됐다.

군계일학. 언제부터인가, 이 네 글자는 밖으로 드러난 외모와 태도에 그치지 않고 내면 세계의 품격을 비유할 때에도 쓰이고 있다. 이런 경우라면, ‘백미(白眉)’나 낭중지추(囊中之錐)와도 의미가 서로 통한다. ‘군계일학’보다 빼어났다는 그 혜강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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