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지극히 사랑했던 남자, 김덕형

2024-10-14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92)

김덕형은 늘 화원으로 날쌔게 달려간다.

꽃만 바라보고는 하루 종일 꿈쩍도 하지 않는다.

꽃 아래 자리를 마련해 그대로 누워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손님이 와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김덕형이 미쳤거나, 멍청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손가락질하고 비웃는다.

- 《백화보》 서문 중에서

꽃은 참 아름답다. 보기에도 좋고, 쓰기에도 좋다. 식물이 생명의 절정에서 피워 올린 꽃은 때로는 따뜻한 위로가 되어주고, 때로는 따뜻한 옷감이 되어준다. 옛사람들도 꽃을 예사로 보아 넘기지 않았다. 꽃을 심고, 관찰하고, 애지중지했다.

설흔이 쓴 이 책, 《따뜻하고 신비로운 역사 속 꽃 이야기》에는 꽃에 심취한 이들이 여럿 나온다. 꽃을 너무 좋아해 ‘꽃에 미쳤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김덕형과 목화씨를 가져와 목화를 대량으로 재배한 문익점이 대표적이다.

김덕형은 실학자이자 《북학의》로 유명한 박제가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김덕형은 꽃 그림을 잘 그리기로 소문난 화가였다. 당대의 이름난 화가였던 표암 강세황도 인정한 실력이었으니 과연 출중했던 듯싶다. 그는 새벽부터 밤까지 꽃만 보며 꽃 그림을 그렸다. 굉장히 세밀하게 줄기 하나, 솜털 하나까지 그렸으니 말하자면 오늘날 식물도감에 나올 법한 그림이었다.

꽃 그림이란 입신양명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아니었고, 심지어 어떤 물건을 지나치게 좋아하면 뜻을 해칠 수 있다는 ‘완물상지’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조선 사회는 성리학이 아닌 어떤 대상을 깊이 탐닉하는 것을 경계하는 풍조가 있었다.

이런 사회 풍토에서, 그저 자신이 좋아서 온종일 꽃을 바라보고 그리는 김덕형은 한마디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박제가는 이런 김덕형을 신기하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언가에 이토록 열정을 불태우는 모습을 부러워했다. 김덕형은 박제가에게 자신이 만든 식물도감인 《백화보》에 서문을 써 달라고 부탁했고, 박제가는 흔쾌히 수락하여 붓을 들었다.

(p.94)

김덕형의 기술은 그 어떤 위인에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백화보》를 그린 김덕형은 ‘꽃의 역사’에 공헌한 공신으로 기록될 것이다. ‘향기의 나라’에서 제사를 올리는 위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꽃의 역사’에 공헌한 공신. 조선 역사에 많은 공신이 있었지만 이렇게 남다른 공신이 있었던가? 이 서문을 받아 든 김덕형의 마음은 참으로 뿌듯했을 것 같다. 안타깝게도 《백화보》는 지금 전해지지 않지만,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꽃을 하나하나 그려낸 김덕형이 이 책을 얼마나 귀히 여겼을지 눈에 선하다.

그리고 또 한 명, 역사에서 꽃으로 한 획을 그은 사람이 있으니, 바로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이다. 실은 그 이전에도 고려에 목화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목화를 대량 생산하고 옷까지 지어 입게 된 것은 확실히 문익점의 공이 컸다.

목화를 재배하기 전 사람들은 ‘삼’이라는 풀을 짜서 만든 베옷을 가장 많이 입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베옷은 더운 여름을 나기에는 좋아도 겨울에는 그보다 더 추울 수 없었다. 이 문제를 고민하던 문익점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흰 밭과 마주쳤다. 목화밭이었다.

문익점은 어렵사리 목화씨를 구해 고려로 돌아왔지만, 곧 관직에서 쫓겨나 귀양을 갔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도 잠시, 문익점은 ‘오히려 잘됐다’라고 생각했다. 장인 정천익을 만나 의기투합하고, 정천익이 가진 땅에 목화 꽃씨를 심었다.

중국에서 건너온 씨앗이 낯선 땅에서 아무 탈 없이 자랄 리 만무했다. 조금 자라다 죽고, 조금 자라다 죽는 과정에서 천운인지 한 그루를 건졌다. 문익점과 정천익은 목화 재배 기술을 갈고닦으며 열심히 목화를 재배해 나갔다.

그런데 고민거리가 있었다. 목화가 꽃을 활짝 피우고 솜을 만들어냈지만, 막상 그 솜으로 어떻게 실을 만드는지 몰랐다. 실을 만들려면 솜에서 꽃씨를 빼내고 솜을 꼬아 실로 만들어야 했지만, 문익점과 정천익은 그 과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뜻이 있는 곳에 운이 따르는 것인지, 마침 중국에서 온 승려 한 명이 고려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중국에 있는 절에 있을 때 솜으로 실을 여러 번 만들어 봤던 승려였다. 우연히 정천익의 목화밭을 본 그는 깜짝 놀라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전했다.

정천익과 문익점은 승려 홍원의 도움을 받아 목화꽃에서 꽃씨를 빼내는 도구인 씨아, 실을 뽑는 도구인 물레를 완성했다. 정천익은 솜씨 좋기로 소문난 여종을 불러 도구를 익히게 하자, 여종은 훌륭하게 천을 완성해 냈다. 역사 속 길고 긴 추위와의 싸움에 새로운 장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p.66)

문익점은 길가의 목화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 정천익에게 이를 심어 기르게 했다. 다만 한 개만이 살게 되었다. …… 중국의 중 홍원이 정천익의 집에 이르러 목화를 보고는 너무 기뻐 울면서 말했다.

“고향의 물건을 이곳에서 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정천익은 그를 머물게 하여 대접한 후에 실 뽑고 베 짜는 기술을 물었다. 홍원이 그 상세한 것을 자세히 알려 주고 기구까지 만들어 주었다.

- 《 조선왕조실록》 에서

훗날 세조는 문익점에게 ‘부민후’, 곧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든 공을 세운 사람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과연 문익점 덕분에 헐벗고 추위에 떨던 이들이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게 되었다. 문익점 역시 성리학을 공부한 유학자였지만, 그 누구보다 민생에 관심을 가지고 궁리한 끝에 길이 남을 훌륭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문익점의 공은 널리 알려졌어도, 장인 정천익과 승려 홍원의 이야기는 알고 있는 이들이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역사 속 훌륭한 조연이 없다면 주연의 활약도 빛이 바랜다. 이 책을 계기로 이들의 노력도 다시 한번 기억했으면 좋겠다.

역사 속 활짝 핀 꽃 이야기. 꽃을 향한 순수한 관심도, 많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자 했던 마음도 참 아름답다. 이번 가을에는 꽃을 지극히 사랑했던 김덕형처럼, 한 번쯤 주변에 있는 꽃을 천천히 바라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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