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평일 아침, 벗이 아프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름만 들어도 무서운 암이란다. 이 또한 지나간다고, 다 치유될 거라고 가볍게 대화했다. 쉼의 기회로 삼고 몸을 돌보는 시간으로 경험하길, 어서 쾌차하길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필자도 과거에 암을 경험한 적이 있다. 20대에 가볍지만 가볍지 않은 갑상선암으로 만났다. 한 번의 수술과 세 번의 항암을 하면서 가족이 아닌 누구에게도 투병을 알리지 않았다. 굳이 누군가에게 슬픔이나 걱정을 나누고 싶지 않았고, 당연히 나는 완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 순간이 흘러간 뒤 무용담쯤으로 치부해버릴 요량이었다.
평일의 바쁜 일상이 흐른 뒤 금요일 밤, 고요히 집에서 침잠하는 시간이다. 다양한 사유가 흐른다. 문득 슬픔과 걱정이 인다. 따뜻하게 전하지 못한 마음들도 떠오른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며 나를 잡아먹는다. 이럴 때는 몸을 움직이는 것이 상책이다. 생각은 생각일 뿐이다. 편한 산우에게 전화를 건다. 우리는 가까운 간월재로 향하기로 했다. 11월 초지만 가을이 올 기미가 없는 따뜻한 날들의 연속이다.
우리는 가벼운 차림으로 나섰다. 철에 맞지 않는 이례적 현상들이 즐비한 나날들이다. 기후위기가 심히 걱정된다. 작은 실천이나마 김밥을 다회용기에 포장하며 일회용을 사용하지 않는다. 자연에서 온 재료로 덜 가공된 떡이나 과일을 간식으로 챙기는 것으로 작은 위안을 삼는다. 걱정될 때는 불안한 감정에 매몰되는 것보다 걱정을 현재에서 해결할 수 있는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실제 걱정의 원인을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등억리를 들머리로 잡았다. 가을철 산객들의 차량이 줄을 섰다. 멀리 주차하고 걷는다. 사람들은 쉼의 공간으로 자연을 찾는다. 걸어가는 인도 위 연산홍이 떨어져 있다. 속으로 ‘당연히 조화일거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니 생화다. 주변 화단에 연산홍이 드문드문 피었다. “세상에 봄꽃이 11월에 피다니요.” 산우가 말한다.
산으로 걸어 든다. 가을볕이 나무 사이로 내려와 공기가 따뜻하다. 지난밤 비로 길이 축축해서 미끄러지지 않으려 애쓰는 발걸음에 다리가 점점 무거워진다. 호흡이 가빠 올 때쯤 절터꾸미에 도착한다. 과거 절이 있었던 곳에 터만 남았다고 했다. 그 자리에 누군가의 묘가 들어섰다. 묘와 굽은 노송이 있는 자리는 자주 산객들의 쉼터가 되었다.
우리도 여기서 쉬어가기로 했다. 가장 커다란 소나무 아래 판판한 돌들이 모여있다. 누군가가 부러 모아둔 돌이다. 그 돌을 의자 삼아 자리를 잡는다. 잎이 여기저기 갈색으로 변해있었다. 고송은 힘없이 그래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모든 생명은 태어나면 죽는다. 하지만 절터꾸미를 지키며 그늘과 운치를 만들어주는 소나무들이 병들어가는 모습이 여간 마음이 쓰인다. 소나무에게 치유의 에너지를 마음으로 간절히 보냈다.
꼬불꼬불 임도를 올라 간월재에 당도한다. 도착한 시간은 오후 한 시 반, 식사 시간이 조금 지났으니 매점이 한산할 것으로 예상한 우리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언제나 삶은 예측불허다. 매점에서 라면을 사려는 산객들의 줄이 간월산으로 향하는 등로까지 이어졌다. 억새는 제철이 지났지만, 산정에도 사람들이 빽빽하다. 경치가 막혀 비교적 고요한 자리를 찾는다. 벗과 함께 가을볕을 등으로 받치고 앉는다. 따스함이 온몸에 스민다. 바람도 고요하다. 챙겨온 두터운 외투가 무색하다. 따스함과 경치를 만끽하며 도시락을 먹는다. 김밥의 양보다 조금 컸던 용기 덕에 걷는 동안 김밥은 비빔밥이 되었다. 그래도 괜찮다. 산에서는 무엇이든 맛있다. 모양이 우스워 웃음과 함께 비빔김밥을 먹는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니 경치의 감흥이 더해진다. 평안한 마음이 되어야 자연의 아름다움이 잘 보인다. 자연은 언제나 경이롭다. 따스한 가을볕을 투병 중인 벗에게 사진으로나마 보낸다. 자연이 주는 힘이 있다. 자연은 가만히 두면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가을 아름답게 물든 잎사귀가 낙엽으로 겨울 이불이 되고, 봄이면 신록이 움트고 여름이면 초록이 놀랍게 세력을 떨친다. 자연은 끊임없는 생명력으로 스스로 그러하다. 어서 벗이 자연을 닮아 평안을 찾기를.
노진경 시민기자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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