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자신이 속한 계층의 신념·행동체계를 좇는 인간의 무의식적 성향을 ‘아비투스(habitus)’라고 불렀다. 집단이 ‘제2의 본성’처럼 갖는 습성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연말까진 예산부처인 기획재정부에 ‘아비투스’가 있다면 나라의 곳간지기 같은 마음가짐이 아닐까. 지속가능한 재정을 향한 단심(丹心) 말이다.
한데 ‘예산 아비투스’에도 편차가 꽤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가 대선 직전에 공저한 『잘사니즘, 포용적 혁신성장』에 쓴 대목과 안일환 전 경제수석의 신간 『국가채무와 경제위기』를 비교한 결과다. 예산통인 두 사람은 행시 32회 동기이자 문재인 정부에서 예산실장과 예산과 재정·국고 등을 아우르는 기재부 2차관을 지낸 공통점이 있다. 구 부총리가 예산실장·2차관을 먼저 했고, 모두 후임은 안 전 수석이었다. 요직을 바통 넘기듯 주고받았다. 그런데도 재정 현안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행시 동기 두 예산통의 다른 시각
구윤철은 과감한 재정 투입 강조
안일환은 “나랏빚 늘면 위기 온다”
먼저 『잘사니즘… 』의 시각. “돈이 모자라면 국채를 발행해서라도 과감히 지원해야 한다. 이런 것이 바로 혁신적 재정운용이다.” 구 부총리가 꼽은 재정 운용 대혁신의 10대 원칙 중에는 ▶재정 규모에 집착 마라. ‘예산의 구성 내용’이 중요하다 ▶단기 재정적자와 국가채무 규모에 집착 마라. ‘적자의 발생 원인’이 중요하다 ▶재정건전성 걱정만 하지 말고 ‘재정 지출의 성과’를 높여라 등이 들어 있다. 요컨대 좋은 예산 사업이 있으면 확장재정을 꺼릴 이유가 없고, 소모적·소비적 지출이 아닌 자본적·투자적 지출로 인한 재정적자는 경제 선순환을 가져오며, 재정 지출로 국내총생산(GDP)이 커지면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줄어 재정 건전성이 좋아진다는 거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낙관론에 많이 기대고 있다. 좋은 예산 사업은 무엇이고, 재정 지출의 성과는 어떻게 명료하게 평가할지는 판단이 쉽지 않다. 22조원이 투입된 이명박 정부 4대강 사업의 성과는 아직도 평가가 엇갈린다.
안 전 수석은 “향후 우리나라 국가채무의 누적적 증가는 불가피”하며 “정부 빚이 급증하면 위기가 온다”고 했다. 경제성장률 하락, 저출산·고령화, 복지지출 증가, 적자국채 이자 부담 증가 등으로 세입은 줄고 세출은 늘어나서다. 그는 “신뢰가 바탕이 되는 국가채무의 증가는 어느 수준까진 문제가 없겠지만, 경제성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상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되면서 순식간에 경제위기로 발전할 것”이라고 했다.
가장 큰 차이는 세금이다. 구 부총리는 “증세와 감세 논쟁은 실효성이 없다. 경제 파이를 키워 해결하자”고 했다. 반면에 안 전 수석은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증세가 필요하다고 썼다. 그는 새로운 의무지출을 수반하는 법안에는 재원 조달 방안을 의무화하는 ‘페이고(PAYGO)’ 제도와 재정준칙의 도입을 강조했다. 재정준칙이 도입되면 증가하는 재정지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한 증세 논의도 필연적으로 시작될 것이라는 그의 판단에 공감한다.
국가채무를 400조원이나 늘린 문재인 정부의 예산 관료도 고민이 없진 않았다. 역대 최장수 경제부총리였던 홍남기 전 기재부 장관은 2021년 초 코로나로 인한 자영업자의 손실 법제화에 반대하며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고 소신 발언을 했다. 발끈한 정세균 당시 총리는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고 질타했다. 정치권에 자주 휘둘려 ‘홍두사미’라는 말까지 듣던 홍 부총리도 필요할 땐 할 말을 했다. “국가 재정이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쓰이도록 하는 나라 곳간지기 역할은 기재부의 권리·권한이 아니라 국민께서 요청하시는 준엄한 의무이자 소명”이라는 꽤 근사한 어록도 남겼다.
13조원의 소비 쿠폰은 구 부총리의 예산 10대 원칙에 어긋나는 소모적·소비적 지출인데도 그가 반대했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경제부총리가 ‘예산 아비투스’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