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내란 뒤에 더 각별한 5·18 45주기

2025-05-16

5·18민주화운동 45주년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5·18은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를 만든 우뚝한 이정표 중 하나다. 올해는 12·3 윤석열 내란 이후 처음 맞는 5·18이어서 의미가 더욱 각별하다.

5·18은 평범한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군부 총칼에 맞선 시민항쟁이다.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5월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계엄 포고령을 통해 일체의 정치활동과 정치 목적 집회·시위를 금지하고, 언론·출판·보도·방송을 사전 검열했다. 계엄군을 배치해 국회 출입을 막았다.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을 연행하고, 김영삼을 가택연금했다. 권력 찬탈을 위해 민주주의·헌정질서를 짓밟은 것이다.

광주 시민들은 5월18일 시위로 저항했다. 공수부대가 주축이 된 계엄군은 총·칼·진압봉·헬기·탱크를 동원해 광주 시민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사상자가 속출했고, 시위는 동료 시민을 지키려는 무장항쟁으로 발전했다. 남녀노소, 각계각층의 평범한 시민들이 항쟁에 참여했다. 항쟁은 시민군이 지키던 전남도청을 5월27일 새벽 계엄군이 공격해 접수하며 끝났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지난해 3월 공개한 보고서에서 5·18 민주화운동 기간에 사망 166명, 행방불명 179명, 부상 2617명 등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고 했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망자·부상자·행불자도 적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은 대통령에 취임했고, 12·12 쿠데타 세력은 권력 탈취에 성공했다. 그러나 5월 광주는 1980년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뿌리가 되었고,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져 민주화를 성취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말대로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 것”이다. 이를 토대로 한국은 선진국·문화강국으로 도약했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나라가 되었다.

역진 불가능할 거라 믿었던 한국의 민주주의는 지난 겨울 중대한 고비를 맞았다. 전직 대통령 윤석열은 12·3 비상계엄을 선포해 국회를 군홧발로 짓밟고, 헌정질서·민주주의를 유린했다. 많은 시민들이 1980년 5월 광주의 악몽을 떠올렸을 것이다. 윤석열이 비상계엄과 함께 취한 정치활동 일체 금지, 언론·출판 검열 조치와 여야 정치인 등 체포 시도는 1980년 5월 전두환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취한 조치와 판박이였다. 윤석열의 내란이 성공했다면 한국은 다시 1980년대 암흑시대로 돌아갔을 것이다.

시민들의 비폭력 저항, 국회의 신속한 계엄 해제 의결, 민주주의를 체득한 상당수 계엄군의 명령 불복종으로 내란은 실패로 끝났다.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은 대통령직에서 파면돼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전세계에 보여준 쾌거였다.

12·3 내란을 막은 시민들 모습은 1980년 5월 광주의 시민들 모습과 여러모로 닮았다. 엄동설한에 광장에 나가 밤을 지새우며 ‘윤석열 파면’을 외친 시민들은 전남도청을 사수한 시민들 모습을 연상시킨다. 시위 참여자들을 위해 핫팩을 대량으로 갖다 놓고 커피·차 등을 선결제한 시민들은 1980년 5월 광주의 헌혈행렬과 주먹밥을 나누는 시민들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5·18의 저항정신, 대동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2025년 ‘빛의 혁명’을 이뤘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5·18과 ‘빛의 혁명’은 민주주의는 한 번의 승부가 아니라 부단한 과정이라는 걸 보여준다. 12·3 내란이 실패했음에도 내란옹호 세력의 준동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윤석열이 파면돼 치러지는 이번 대선은 내란 세력, 내란옹호 세력이 이 땅에 다시는 발붙일 수 없도록 하는 계기가 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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