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字:石鏡 이원동
(11) 소년 박정희 -3편
공부 1등·급장…자존감 형성 큰 영향
장애인 급우 돕기는 대통령 된 후에도
학급 통솔 방식 대통령 통치술로 발전
경찰서장이 일본군에 맞는 장면 ‘충격’
이순신·나폴레옹 읽고 ‘군인 꿈’ 키워
‘열등감’ 국민에 자신감 심어준 지도자
◇ 구미보통학교 급장(반장)을 하다.
보통학교(초등학교) 학령기 아동은 그동안 가정이라는 보호 환경에서 벗어나 학교라는 단체에 새로 적응하는 새로운 과제를 맞이한다. 이 시기는 정신의학적으로 본격적인 자아 성장의 가장 결정적인 시기이다. 특히 이 시기는 자존감을 갖느냐 열등감을 갖느냐 하는 주요 시기이다. 보통학교(초등학교) 학령기 아동의 자존감 형성에는 학교성적 및 학업능력, 또래 관계, 학교 선생님의 인정 등이 주요한 영향을 미친다.
정희는 구미공립보통학교에 1926년 4월1일 입학하여 1932년3월1일자로 졸업했다. 의복은 한복. 검은 두루마기에 짚신을 신고 다녔다. 왜소한 몸집에 잔병이 잦은 정희이지만, 학교생활은 성공적이었다.
구미보통학교에 기록된 소년 정희의 학교성적과 학업능력은 뛰어났다. 매 학년마다 기록된 성적은 과목당 10점 만점 기준인데, 정희의 성적표엔 8점 미만은 전무하다. 보통학교시절 성적은 항상 박정희, 김장호, 김홍기, 박승용 순이었다고 한다.
정희의 성적표에 기재된 과목은 수신, 조선어, 일본어, 산술, 국사, 지리, 이과(생물과 물리), 직업, 도화, 창가, 체조, 가사실습 등 12과목에 조행(태도와 행실)평가가 곁들여 있다. 이중 국사, 지리, 이과, 직업, 가사실습은 상급학년(4학년 이상)에서만 배웠다.
정희가 6년 동안 가장 성적이 나쁜 과목은 체조였다. 3학년 때 8점, 나머지는 9점이었다. 체조 다음으로 저조한 과목은 창가였는데 5학년 때 까지 9점만 받다가 6학년에 와서 10점 만점을 받았다. 6학년 때 그의 성적은 체조와 가사실습만 9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만점인 10점이었다.
정희가 특히 잘한 과목은 조선어, 일본어, 역사, 지리였다. 5,6학년 때 모두 10점 만점을 기록한 과목들이다. 이때가 이순신과 나폴레옹에 심취한 시기로서 역사에 대한 호기심이 하나의 성격으로서 굳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6년간 그의 조행평가는 항상 갑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소년 정희의 보통학교 시절 우수한 학교성적 및 학업능력은 자존감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1, 2학년 때는 급장(반장)을 담임선생이 지명했으나 3학년 때부터는 교칙이 바뀌어 1등을 하면 급장(반장)을 시켜주는 새로운 제도 덕분에 공부를 잘하던 정희는 3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내내 급장(반장)을 했다.
소년 정희에게 급장(반장)은 작은 키와 가난이 열등감이었던 그의 인생에 있어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다. 급장(반장)은 친구들과 선생님들로부터 중대성이 증대되는 주요한 자리이다. 이러한 주요 위치에 자리매김함으로써 정희는 자존감 형성은 물론 자신의 유능감을 더욱 증명하려는 근면성과 우월성 추구를 향한 노력을 배가하였을 것이다. 정희는 학급 중 어린 편이었으나(연령차가 많았고, 정희보다도 5, 6세 위도 있었음) 급장(반장)으로서 통솔력이 탁월하여 자습시간 등에는 학우들을 지도하였으며 체육 시간에 선생님이 나오기 전에 준비를 갖추어 기다리도록 지도를 잘하고, 학급 운영을 선도적으로 척척 해내는 등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다. 정희에게 급장(반장)은 열등감에서 우월감으로의 대전환이었고 훗날 지도자로 가기 위한 초석이었다.
어머니 백남의는 막내 정희에게 사랑채의 한 방을 공부방으로 내어주었다. 어릴 때부터 ‘나만의 공간’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정희로 하여금 아동으로서는 지나칠 정도로 과묵하고, 냉철하였으며, 사색적 성격을 형성하는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성격의 정희였지만 구미보통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조리있는 발표력을 가진 학생이라는 칭찬을 자주 들었고, 수업시간에는 남보다 먼저 손을 들고 자신감 있게 발표했다. 또한 선생님들로부터 급장(반장)으로서 통솔력이 탁월하다는 칭찬을 자주 들었고, 학급 중 어린 편임에도 불구하고 학급 운영을 선도적으로 잘했다.
‘자기실현적 예언’이라는 것이 있다. 타인의 긍정적인 기대나 관심이 한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을 말한다. 타인의 언어적 또는 비언어적 긍정적 기대는 그 기대를 받는 사람의 부응 심리와 서로 맞물리면서 상승효과를 나타내어 자기실현이 된다는 것이다. 특히 어렸을 때 아이에게 절대적인 인간관계인 부모나 선생님이 아이를 바라보는 관점은 매우 중요하다. 소년 정희에게 어머니 백남의와 보통학교 선생님들의 긍정적 기대와 관심은 정희의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었으리라.
정희가 보통학교 3학년이었을 때, 아버지 박성빈은 “정희야. 너는 반드시 힘을 길러야 한다. 힘은 덩치만이 아니라 머리, 의지, 여럿이 함께하는 단결력 모두를 말하는 것이야. 우리나라는 너무나 힘이 없다. 청나라에 꼼짝 못 하고 끌려다니다가 일본에 망해 이제는 노예처럼 살고 있다. 몇 년 전에 일어났던 3.1 운동은 너무나 무기력한 조선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정희는 “아버지. 3.1 운동은 그래도 우리 민족이 일본군 앞에서 크게 힘을 냈던 거 아닌가요?”라고 물으니, 아버지 박성빈은 “그러긴 하지. 하지만 얼마나 힘이 없으면 사람들이 모여서 한다는 것이 기껏 ‘만세’나 불렀을까? 놈들은 총칼을 들고 우리를 향해 찌르고 쏘는데…”라고 하였다고 한다.
정희는 아버지께서 말씀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이후 정희는 힘을 기르는 방법을 찾아 헤매야 했다. 학급 급장(반장)을 하면서도 ‘힘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덩치가 문제가 아니라 성적으로 친구를 압도하고, 옹골찬 독기로 상대를 제압하고자 했다. 운동장에 나서면 누구보다 앞서 질주하고, 뒷산을 오를 때에도 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느 누구도 나를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소년 정희’를 스스로 만들어 갔다.
사람들마다 제 각각 자기만의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소년 정희도 작은 키와 가난이 열등감이었다. 열등감을 갖고 평생을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이 가진 열등감으로 인해 더욱 성장하는 사람도 있다. 차이는 열등감의 유무(有無)가 아니라 열등감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각자의 태도에 달려있다. 열등감은 개인에게 안 좋은 영향도 주지만 그 열등감을 제대로 인식하고 잘 활용하면 좋은 자산이 될 수 있다.
소년 정희는 작은 키와 가난의 열등감을 부정하려하거나 무작정 억압하지 않고 내 안의 열등감을 먼저 마주하고 받아들였다. 자신의 열등감을 긍정적 동기 부여로 삼고 도전의 원천으로 삼은 인물이었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속담처럼 “작고 가난하다는 것에 기죽지 않고 맵다”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인지 정희는 어릴 때 몸집이 비록 작았지만 야무진 데가 있어 ‘악바리’, ‘대추 방망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를 두려워해서 그의 별명을 함부로 부르지 못했다. 정희가 급장(반장)을 지냈던 3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급우들 가운데 그로부터 맞아 보지 않은 아이들이 드물 정도였다. 동급생들보다 키가 작았던 정희는 겁도 없이 말 안 듣는 아이들이 있으면 체구나 나이가 위인데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보통학교 동기들의 말에 의하면, 소년 정희에게는 강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고 한다. 이 때의 면모는 훗날 군인 시절로까지 이어간다. 훗날 대통령이 되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작은 몸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강한 카리스마 때문에 압도당했다고 말한다.
정희는 자신의 열등감인 가난과 작은 체구의 문제를 극복하고 38명의 급우들을 통솔하는 데 상당한 능력을 발휘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우등생이 되고 교사로부터 인정을 받아 낸 것은 노력을 통해 자신의 작은 키와 가난의 열등감을 극복하고 우월성을 추구하려는 보상과 승화의 노력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보다 유리한 조건에 있는 친구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해지고 몇 배로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동료 급우들에게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은 권위를 유지하고 빈틈을 보이지 않겠다는 자세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권력의 속성인 권위력과 강제력을 사용해 상대를 굴복시켰다.
정치에 사용되는 힘은 권위력(권위주의), 강제력(전체주의), 교환력(민주주의)으로 나눠진다. 소년 정희의 급장(반장)시절을 살펴보면 권위력과 강제력을 동원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으나 교환력을 사용한 흔적도 있다.
“힘이 세고 말을 잘 듣지 않는 급우가 한 명 있었다. 그러나 그가 수학은 전연 못하고 늘 선생님께 꾸지람을 듣는 것을 보고, 정희가 그가 자신의 말을 잘 듣게 하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휴식시간에 산술문제를 가르쳐 주고 숙제 못 해온 것을 휴식시간에 몇 번 가르쳐 주었더니 그 다음부터는 내 말이라면 무조건 굴복하던 생각이 난다.”
소년 정희는 생각을 하고 있다. 완력에서는 당할 수 없는 상대를,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으로 통제하고 있다. 소년 정희는 벌써부터 사물을 선과 악이란 기준으로 보지 않고 있다. 전략적 발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희는 오른쪽 무릎을 굽히지 못하는 장애를 갖게 된 친구 이준상에게는 완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한 우정으로 대했다. 이준상은 지팡이에 의지한 채 학교를 다녔다. 다른 친구들이 이준상을 장애인이라 놀릴 수도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준상의 곁엔 항상 급장(반장)인 정희가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훗날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 선거에서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고향을 찾았을 때, 금의환향한 환영 인파 속에서 박정희는 다른 일을 제쳐둔 채 제일 먼저 그의 친구 이준상을 찾았다. 허름한 차림의 이준상을 만나고는 자신의 지프에 태워 생가로 이동했다. 이 사건 이후 구미에서는 가난한 장애인 이준상을 아무도 업신여기지 못했다고 한다. 1972년 이준상이 어릴 때 다친 다리를 또 다시 다쳐서 입원했을 때 대통령 박정희는 그의 병원치료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소년 정희는 훗날 강자에게는 굴하지 않고 한없이 강하였지만, 약자에게는 보살핌과 배려를 하는 한없이 따뜻한 박정희로 이어진다.
또한, 어린 시절 정희는 자신보다 더 성장한 형제들에 둘러싸였지만, 열등감을 느끼기 보다 집안에서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독차지하고 보통학교를 입학하는 등 집안의 대표 주자로서 우월성 추구에 대한 강한 동력의 근거를 맞이했으리라. 또한, 급장(반장)은 작은 키와 가난의 열등감에서 우월감으로의 대전환이었고 선생님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은 유능감을 넘어 자신감으로 이어졌으리라. 뿐만아니라. 1등인 성적의 지적 능력,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는 등하굣 길을 통해 쌓은 체력과 정신력은 자존감을 넘어 자신감을 더하는 좋은 요소였으리라.
대통령 박정희는 ‘식민 트라우마’, ‘분단 트라우마’, ‘6.25전쟁 트라우마’, ‘절대 빈곤’ 속에서 “우리는 할 수 없다”라는 열등감 콤플렉스(Inferiority Complex)로 가득 차 있던 국민들에게 “나는 할 수 있다. 우리는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自信感)을 심어준 지도자였다. 개인의 열등감을 넘어 민족적 열등감을 치유해준 ‘박정희 정신(朴正熙精神)’에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그 정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고 우리가 있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 이는 작은 키와 가난이라는 열등감에서 자신감으로 승화시킨 소년 정희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으리라.
정희가 구미보통학교를 다니던 시절, 등하굣길 중간에 광평동 평야가 있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텅 빈 들판에서 이따금 대구 주둔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가끔 구미에 와서 야외훈련을 하곤 했다.
어느 날 하굣길에 정희가 선산경찰서장이 일본군 부대장에게 말 채찍을 맞으면서도 ‘하이(네)! 하이!’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당시 일본 순사만 해도 조선 사람들은 슬슬 기었다. 특히 정희가 존경하던 상희 형을 괴롭히고 위협했던 것이 일본 순사였다. 그런데 경찰서장이 군 부대장 앞에서 벌벌 떨면서 말채찍을 맞는 걸 본 어린 정희는 그때부터 군인이 가장 센 사람으로 머리 속에 각인됐다.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강한 사람이 되고자 군인의 꿈을 키웠다고 본다. 이즈음 정희는 병정놀이를 즐겨했다. 뒷동산에 올라 나무칼을 휘두르는가 하면 아이들을 불러모아 대장 노릇을 했다. 어머니 백남의는 “아무래도 저 아이는 군인이 되겠군”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병정놀이는 사물을 힘과 승패의 관점에서 보는 그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정희는 독서광이었다. 구미보통학교의 정희 학생은 말이 없고 생각은 많은 아이였다. 소년 정희를 생각에 빠지게 만들고, 소년의 마음에 크게 감명을 주었던 이순신과 나폴레옹 전기를 읽은 것도 이때였다.
보통학교 5학년 때, 정희는 춘원 이광수가 쓴 <이순신>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고, 겨우 열두 척 남은 배로 수백 척의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이순신 장군을 몹시 숭배하게 되었다. 소년 정희는 “이런 분이 지금도 계셨다면 우리가 지금처럼 왜놈의 종살이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 아, 정말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생각하며 애국심이 그의 어린 가슴을 흔들었다.
정희를 생각에 빠지게 만든 것은 이순신에 이어 나폴레옹이었다. 6학년 때 어느날, 정희는 상희형 방에서 <나폴레옹> 전기를 발견하였다. 무심코 책장을 넘기고 몇 줄 읽던 박정희는 그 책을 들고 마루로 나와 정신없이 읽기 시작하였다. <나폴레옹>은 그에게 굉장한 충격이었다. 금방 책 속에 빠져들어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코르시카의 조그마한 섬에서 태어난 이름 없는 시골 청년 나폴레옹이 프랑스 국민 영웅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너무도 흥미로웠다. 눈보라치는 알프스산맥을 백마를 타고 넘을 때의 모습! 정희는 이 세상에 이같이 멋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하고 감탄했다. <나폴레옹>을 읽고 난 며칠 동안은, 밤에 잘 때도 백만 대군을 호령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이 나타나곤 했다. 학교 갈 때도, 학교에서 돌아올 때도 말을 몰고 적진을 뚫고 다니는 나폴레옹의 모습이 머릿속에 오락가락했다. <나폴레옹>을 두 번, 세 번 거듭하여 읽었다.
그는 “어떤 어려움도 이겨 내겠다는 각오만 있으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나폴레옹은 불가능이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라고 생각하며, 보통 학교를 졸업하면, 기어코 나폴레옹이 코르시카를 떠난 것처럼 상모리를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그 시절 <이순신>, <나폴레옹>에 대한 독서는 정희의 가슴 속에 군인 생활에 대한 꿈의 씨앗을 뿌려놓았다. 어느새 소년 정희의 마음속에는 앞으로 자라서 어른이 되면 군인으로 살리라는 야무지고 당찬 꿈이 싹트고 있었다.
이순신과 나폴레옹 전기가 박정희의 생애에 끼친 큰 영향은 아동기에 읽는 위인전의 영향이 평생을 간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백지상태의 어린 마음에 최초로 발자국을 만드는 위인들의 삶은 신선한 충격, 흥분, 상상력을 제공하고 인생 설계의 길잡이가 되기 때문이다. 소년 정희가 영웅들의 전기에 심취했다는 것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사회과학의 종합인 역사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이 세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관심으로 발전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동기에서 틀을 잡은 이런 관심과 독서 경향이 그의 인격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고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 후의 청와대 집무실 도서목록이다. ’서재‘라고도 불렸던 이 방에는 약5백50권의 책이 꽂혀 있었다. 그의 사후에 청와대 직원들이 서재를 정리하면서 작성한 도서목록을 살펴보니 역사, 전쟁사, 전기와 관련된 책이 거의 전부이다. 특히 전기가 많았다.
구미보통학교의 소년 정희는 말이 없고 생각은 많은 아이였다. 훗날 대통령 박정희는 깊은 사색 끝에 원대한 전략을 만들어내곤 했다. 그는 “생각한다”는 것의 힘을 안 사람이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기억하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분위기와 구미 보통학교 급장(반장) 시절 소년 정희의 분위기는 묘하게 겹치고 있다. 소년 정희 급장(반장)의 통솔방식이 대통령 박정희의 통치술로 발전한 것이다. 또한, 작은키와 가난이라는 열듬감을 승화한 소년 정희의 자존감, 자신감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
글=박정희아카데미 부속 박정희연구회
저작권자 © 대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