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BS연예뉴스 | 강경윤 기자] 한국 창작 뮤지컬의 자부심을 이야기할 때, '팬레터'는 반드시 언급돼야 할 작품이다.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위태로운 시대 속에서도 문학과 사랑에 모든 것을 건 청춘들의 마음을 고운 언어로 길어 올린다. 화려하게 몰아치지 않는다. 대신 천천히, 그러나 묵직하게 마음 깊은 곳을 두드린다.
2015년 초연 이후 올해로 다섯 번째 시즌을 맞은 '팬레터'는 소설가 김해진과 그를 동경하는 예비 문인 정세훈, 그리고 신비로운 여류 작가 히카루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천재 작가 '이상'과 '김유정', 문인 모임 '구인회'의 일화를 모티브로 삼았지만, 작품이 집중하는 지점은 문학사적 사실이 아니라 '글을 통해 사랑에 빠진 인간의 마음'이다.
'팬레터'는 잔잔한 물길처럼 흘러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 관객은 그 물살 안으로 깊숙이 끌려 들어가 있다. 읽는 사람의 마음을 잠식하는 소설처럼, 이 작품은 조용히 감정을 쌓아 올린 뒤 마지막에 오래 남는 여운을 남긴다.
편지를 통해서 깊은 사랑에 빠진 김해진이 정세훈, 히카루와 함께 왈츠를 추는 장면은 이 작품의 정서적 정점이다. 히카루의 광기 어린 욕망과 정세훈의 순수한 동경이 겹쳐지며 질문이 떠오른다. '글을 매개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 작품은 그 질문에 단정적인 답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가능성과 불가능 사이에서 끝없이 흔들릴 뿐이다. 현실과 판타지가 시소처럼 오르내리는 이 지점이 '팬레터'를 특별하게 만든다.
특히 히카루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순간, '팬레터'는 한층 격정적인 얼굴을 드러낸다. "나는 당신만의 것이었는데, 당신은 나만의 것 아니었습니까."라는 대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집착과 소유욕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히카루는 뮤즈이자 사람이고, 동시에 악몽이다. 관객은 그녀를 비난하면서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그 모순이 작품을 끝까지 끌고 간다.

이번 시즌 김해진 역으로 처음 무대에 오른 뮤지컬 배우 에녹은 발목 부상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혼신의 연기를 보여준다. 어른처럼 따뜻하면서도 아이처럼 순수한 김해진의 결을 설득력 있게 완성했다. 과하지 않은 감정 처리 덕분에 인물의 고독이 더욱 또렷하게 남는다. 정세훈 역의 김리현은 섬세함으로 극의 균형을 잡는다. 동경과 질투, 미숙한 사랑의 감정을 절제된 호흡으로 쌓아 올린다. 히카루 역의 강혜인은 강약 조절이 뛰어나다. 사랑과 광기 사이를 오가는 감정의 진폭이 분명해, 히카루라는 인물이 단순한 '비극적 캐릭터'로 머무르지 않게 만든다.
'팬레터'는 빠른 속도의 감정 소비에 익숙한 시대에 '팬레터'는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 느리게 말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끝내 관객의 마음에 오래 머문다. "그게 누구라도, 편지의 주인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라는 김해진이 마지막 남긴 고백은 우리가 러닝 타임 내내 가졌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작품의 여운은 공연장을 나선 뒤에야 비로소 완성된다.
뮤지컬 '팬레터'는 내년 2월 22일까지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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