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귀족노조’ 담론이 대기업 정규직 노조 비판에서 시작해 보수 정치세력의 권력 강화 수단으로 변화했다는 연구가 나왔다. 노조의 현실을 실제로 비판하기보다는 노동자에게 불리한 정책을 정당화하고 지지층을 결집하는 수단으로 귀족노조 담론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승윤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등은 지난달 <한국사회정책>에 ‘누가 왜 귀족노조를 말하는가? 담론의 제도적 진화에 대한 비판적 분석’ 논문을 발표했다. 연구진은 헌법상 권리인 노조의 활동이 어떻게 ‘귀족노조’로 낙인찍혔고, 이 낙인이 정치·사회적 상황에 따라 어떻게 변해왔는지 보기 위해 연구를 기획했다.
연구진은 귀족노조 담론이 없었던 1900년대부터 2002년까지를 ‘전사기(前史期)’로 두고 5개 전국종합일간지에서 ‘귀족’과 ‘노동’이 포함된 기사들을 분석했다. 이 당시 노동자를 ‘귀족’으로 비판하는 경우는 어용노조 또는 노조 간부의 개인적 일탈에 그쳤다.
연구진은 귀족노조 담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2003년부터 2024년까지 9개 전국종합일간지와 2개 경제일간지 기사 중 ‘귀족노조’와 ‘귀족 노조’가 포함된 기사들을 질적·양적으로 분석했다.
연구진은 귀족노조 담론이 ‘형성기’와 ‘확산기’ ‘활용기’를 거치며 변화해왔다고 봤다. 형성기는 외환위기 직후인 2000년대 초 시작된다. 2002년 11월 매일경제의 ‘한국은 노조공화국인가’ 시리즈 기사가 본격적인 귀족노조 담론의 시작이라고 연구진은 봤다. 대기업 정규직 위주 노조가 많았기 때문에 귀족노조 담론도 주로 이들을 겨냥했다.
조직률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노동귀족 병폐’ 등으로 인해 노동시장 경직성 문제가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는 곧 외국 기업이 한국에 투자하는 데 최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 매일경제, 2002.11.28
2004년 LG칼텍스정유의 파업에 “평균연봉이 6650만원이나 되는데도 노조는 큰 폭의 임금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을 요구하고 있다.”
- 동아일보, 2004.7.28
형성기엔 기업별 임금단체협상이 몰려 있는 여름에 ‘귀족노조’가 포함된 기사가 급증하는 경향을 보였다. 대기업 노사관계에서 노조의 협상력을 약화하는 방향으로 귀족노조 담론이 활용된 것이다. 연구진은 형성기 귀족노조 담론이 “노조 간부 개인의 문제를 지적하는 수준을 넘어 노조 전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확장됐다”며 “기업 단위 노조의 협상력을 약화시키고 노조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는 기능을 수행했다”고 했다.
연구진은 2012년쯤 시작된 ‘확산기’에는 공공부문 구조조정·민영화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서 귀족노조 담론이 활용됐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2013년 철도 민영화, 2015년 노동유연화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도 귀족노조 담론이 사용됐다. 귀족노조 담론의 주된 발화자도 경제계·보수언론·정부에서 주요 정치인들까지로 확장됐다.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철밥통 귀족노조는 민영화 저지라는 국민 호도 프레임으로 눈속임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한국경제, 2013.12.24
연구진은 “정부는 노조를 귀족·기득권 노조로 규정하며 이들이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원인이라는 프레임을 형성하며 노조의 정당성을 약화시켰다”며 “실제로 당시 노조는 불안정 노동자를 포괄하는 목소리를 냈지만 귀족노조 담론으로 사회적 정당성이 약화되는 상황에 놓였다”고 했다.
연구진은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 이후 현재까지를 귀족노조 담론의 ‘활용기’로 규정했다. 활용기 귀족노조 담론은 “특정 노사갈등이나 구체적 정책을 넘어, 정치세력의 결집을 위한 독자적 프레임으로 전환됐다”고 연구진은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 탄핵 때 귀족노조 담론 관련 기사는 262건으로 대폭 증가해 전체 분석 기간 중 가장 많았는데, 대부분 대선 기간 보수정당 후보의 발언에서 나왔다.
윤석열 정부 때는 2022년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하청노동자와 화물노동자, 2023년 일용직이 대다수인 건설노동자 등 기존의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이 아닌 불안정 노동자 노조에도 ‘귀족노조’ 프레임이 씌워졌다. 귀족노조 담론 발화자들도 보수 정권 행정관료들까지로 확대됐다. 연구진은 “(모든 노조를 귀족으로 규정하며) 노조의 구체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노조 활동 전반을 일괄적으로 비난하며 정책적 정당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용산 대통령실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 “소수의 귀족노조가 다수 조합원과 노동약자들을 착취하고 약탈하는 구조가 방치된다면 지속 가능한 성장의 발목을 잡을 뿐만 아니라 일자리 창출이 무엇보다 어렵게 된다”며 노조 회계 투명성 강화에 대해서도 재차 강조했다.
- 중앙일보, 2022.12.28
연구진은 “현재의 귀족노조 담론은 노조의 전반적인 사회적 정당성을 부정하고, 노동자들 간의 계층적 분열을 조장하면서 정부의 정책적 권력을 더 강화하는 전략적 수단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했다.
연구진은 한국의 중앙집권·권위주의적 정치체제와 기업별 노사관계체제가 귀족노조 담론의 악영향을 키웠다고 지적했다. 중앙집권·권위주의적 정치체제에서 담론은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주고받는 ‘조정적 담론’이 아니라, 정치세력이 자신들의 정책을 대중에게 일방적으로 설득하는 ‘의사소통적 담론’이 되기 쉽다. 중앙·산별 교섭이 아니라 기업별로 교섭하는 환경에서는 조정적 담론 형성이 더 어려워지고, 노조는 귀족노조 담론에 더 취약해진다고 연구진은 봤다.
연구진은 “귀족노조 담론이 어떻게 노동기본권을 침식하고 노동정치를 왜곡하는지에 대한 체계적 분석과 비판이 필요하다”며 “귀족노조 담론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비판적으로 해체하고, 새로운 담론적 실천을 통해 대안적 노동정치의 지평을 열어가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