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 한번 쐬자”는 말에 경기도 남쪽에 있는 둘레길을 트레킹했다. 코스를 마무리할 무렵 근처에 소 농장이 있다는 안내판을 보자 친구가 “나도 소를 키워본 적이 있는데 가보자!” 하여 농장을 찾았다. 농장에는 양과 염소, 말도 방목되고 있어 작은 사파리를 돌아보는 듯했다. 풀을 뜯다 머리를 들고 허연 콧김을 내는 소, 풍경 소리 같은 워낭소리를 내며 되새김하는 소, 구경꾼들을 멀뚱멀뚱 바라보면서 긴 꼬리로 궁둥이를 휘둘러 때리는 소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안내원이 설명했다. “아시다시피 소가 주는 혜택은 헤아릴 수가 없지요. 우유와 살코기는 물론, 내장인 곱창과 간, 혀도 우설(牛舌)이라고 해서 먹지요. 꼬리는 꼬리곰탕, 머릿살은 소머리국밥으로, 피는 선지, 뼈는 사골 국물로, 뿔은 공예품, 가죽은 가죽제품으로 쓰입니다. 또 뭐가 있을까요?”
평생 쟁기 끌어 쌀농사 돕고
새끼 팔려가면 내내 혀로 핥아
지도자는 소의 희생 본받아야

혈색 좋은 한 어르신이 답한다. “심신 안정제인 우황청심환도 있어요! 소 쓸개 속에 뭉친 덩어리인 우황(牛黃)으로 만들지요.” 이어 한 꼬마가 말한다. “소똥을 연료로 쓰는 나라도 있대요.” 이 말에 안내원은 “맞아요. 지금도 인도에 가면 ‘소똥 케이크(cow dung cake)’가 시장에서 연료로 팔리지요. 소비자 물가지수 항목에도 들어가요”라며 꼬마를 칭찬한 후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이번에는 어르신이 아이스크림을 손에든 꼬마에게 노래 한번 불러 보라고 하자 ‘소야 소야 고마워’라는 동요를 불렀다. 어르신은 “고놈 물건일세!”라며 기특해했다.
안내원의 설명이 끝난 후 ‘물건’이라는 단어가 귓가를 맴돌아 물건(物件)의 한자로 떠올려 보았다. 물(物)자에도, 건(件)자에도 소 우(牛)자가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돌이켜 보면 소는 온몸을 바쳐 우리에게 단백질을 제공했다. 어디 그뿐인가. 농사철에는 어깨에 멍에를 지고, 쟁기를 끌며, 수레도 끌었다. 인류는 소의 쟁기질 덕분에 쌀도 넉넉히 먹을 수 있었다. 소가 쇠로 된 쟁기날을 끈 덕분에 곡류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늘어나자 인간은 정주(定住)를 시작하고 체계적인 교육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실로 소는 희생(犧牲)의 대명사이다. 희(犧)자에도, 생(牲)자에도 소 우(牛)자가 들어있다. 소의 쟁기질은 소가 한 살이 되기 전에 코뚜레를 끼움으로써 시작한다. 코뚜레에 묶은 줄은 ‘고삐’라고 했다. 친구가 어릴 적 소를 몰고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코뚜레와 고삐 덕분이다. 그래서인지 중국인들은 문제의 핵심을 ‘소의 코’라는 뜻으로 ‘우비자(牛鼻子)’라고 한다. 한편, 영어권에서는 ‘고삐(rein)를 죈다’는 말을 종종 쓴다. 인간보다 덩치가 큰 소는 멍에를 지고, 코뚜레에 꿰이고, 고삐로 조여지며 인간과 ‘친구’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된 소에게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한 인간은 소에게 우공(牛公)이라는 닉네임도 부쳐 주었다.
농장 측의 설명이 끝나고 풀밭 울타리 속 소 떼 중 순하게 보이는 암소에게 다가갔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소를 멀리서만 보았지 가까이에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두 눈을 맞대고 본 암소는 무표정했지만 외로워 보였다. 이 모습을 보던 친구가 “소가 뭐래?”라고 농담을 하더니 어릴 적 소와의 추억담을 풀어 놓았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소가 송아지를 낳았네. 학비를 걱정하시던 어른들은 오늘 같은 봄날에 두 달 된 송아지를 우시장에 내다 팔았지. 그런데 어미 소가 송아지가 팔려가기 일주일 전부터 계속 핥아주는 거야. 결국 어미 소는 송아지가 보이지 않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며칠을 먹지 않더군. 밤이 되면 축사에서 들리는 어미 소의 가뿐 숨소리에 할아버지는 잔기침으로 마음을 달래셨고….”
이야기를 계속하던 그는 손등을 눈가로 가져가며 할아버지를 회상했다. “한학을 하시던 할아버지는 옛사람들이 어미 소가 팔려갈 송아지를 핥아주는 모습을 보고 ‘지독지애(舐犢之愛)’라는 성어를 만들었다고 하셨지.” 오랜 세월 우리와 논을 갈고, 두렁을 걷던 소가 이제는 자리를 트랙터에 넘겨주었다. 기계가 지배하는 오늘날 우리는 소가 가르쳐준 은근함과 참을성을 ‘느리고 답답한 것’이라고 여기고 빠름과 예리함을 추구한다. 그러다 보니 심성도 날카로워진 게 아닐까? 남과 생각이 조금만 달라도 날을 세우면서 “너 말하는 거 보니까 지난번 선거에 누구 찍었지?”라는 식으로 남의 생각까지 건너짚기도 한다. 날카로운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면도날은 그 날카로움으로 종이 몇장은 정교하게 자르지만 두꺼운 것은 자르지 못한다. 그러나 작두는 날이 무디지만 두꺼운 것을 자른다. 여기서 지도자의 역할도 유추해본다. 지도자는 목표와 방향성에 따라 작두의 묵직함과 면도날의 예리함으로 일을 처리하되, 동지와 동료들을 ‘지독지애’로 사랑할 때 비로소 진정한 ‘우두(牛頭)머리’가 되지 않을까?
곽정식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