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자금 6할 담당”...김구가 말한 백산 생애 다룬 영화 12월 개봉

2024-10-15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뒤 백범 김구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운동 자금의 6할이 안희제 손을 통해 나왔다”고 말했다. 김구가 지칭한 안희제는 백야 김좌진과 함께 독립운동가 ‘삼백’으로 불리는 백산(白山·백두산을 의미) 안희제(1885~1943)다. 일제강점기 사업가로 교육가로, 독립운동 지주 역할을 했던 안희제의 생애와 독립운동사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다룬 영화 ‘백산白山-의령에서 발해까지’가 12월 개봉한다.

이 영화는 백산 일생과 독립자금을 공급할 수 있었던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등을 탐사보도 저널리즘 기법으로 접근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화는 백산의 고향인 의령군 부림면 입산 마을부터 시작한다. 이후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후 10대인 백산이 고향을 떠나 중국과 러시아까지 가게 된 과정을 추적한다. 그 후 경제학을 배워 부산에 돌아와 백산상회(백산무역 전신)를 차린 뒤 경주 최부자댁을 비롯해 영남권 지주들과 함께 본격적인 독립운동 자금 마련에 뛰어든 과정을 세밀하게 재현한다. 이 과정에 백산상회와 백산무역, 그리고 백산이 살았던 부산 자택을 고증했다.

일제 감시가 심해지자 백산은 만주로 이동, 1932년 ‘발해농장’을 건설했다. 겉으로는 농장이었지만 사실상 임시정부 살림살이를 지원하는 독립운동기지였다. 영화는 일본의 〈일본 신사록〉, 〈만주국공보〉, 중국의 〈영안현 조선족〉 등에서 기록을 찾아내고, 또 독립운동가 성재 권오봉의 〈성재일기〉 속에서도 백산과 발해농장 기록을 최초로 확인해 이곳이 나라 잃은 백산에게 또 다른 나라였다는 의미를 되짚어낸다. 백산은 발해농장을 찾아온 조선 유랑 농민을 소작농이 아니라 자작농으로 삼아 농장을 운영했고 이를 통해 마련한 자금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발해 농장에 가기 전 백산은 중외일보(중앙일보 전신)를 인수해 전국 3대 일간지로 키우고, ‘자력’이라는 잡지도 만들었는데 이것 또한 독립운동 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그의 또 다른 비밀 활동이었다.

특히 다큐멘터리 제작진은 어려움 속에도 발해농장이 있던 지역을 드론으로 촬영해 그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만주 ‘발해농장’ 규모를 최초로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다. 또 딥 페이크(Deep fake) 기술 등을 활용해 백산과 당시 그의 아내 모습을 생생하게 복원해 냈고, 백산의 생가, 발해농장, 그리고 백산이 9개월간 투옥했던 만주 ‘액하감옥’을 구현하기도 했다.

백산은 1942년 10월 임오년에 대종교 관계자 등 다른 독립운동가와 함께 액화감옥에 투옥된 뒤 9개월간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 후 감옥에서 풀려나 얼마 뒤 생을 마감했다. 백산은 아들에게 “자신을 밀고한 밀정에게 절대 복수하지 마라, 그냥 용서하라”는 취지의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면서 “뒷산에 과실나무를 심었느냐, 스스로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 뒤 눈을 감았다.

이 다큐멘터리는 현직 기자이자, 〈물의 기억〉 등 다양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KNN 진재운 기획특집 국장이 감독과 내레이션을 맡아 제작했다. 진 감독은 “이번 다큐는 백산이 왜 그렇게 어려운 길을 포기하지 않고 갔는지 백산에게 묻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는데 영화를 따라가면 그 답을 행동으로 내놓고 있는 백산을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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