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읽기] 아비의 사랑이 담긴 덕수궁

2024-10-15

조선왕조는 500년을 보내며 여러 이유로 한양에 5개의 궁궐을 지었다. 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희궁은 처음부터 궁궐로 지었지만, 덕수궁(경운궁)은 ‘사가(私家)’로 지어진 것이 궁궐로 전환된 사례다. 덕수궁은 세조가 무척 총애하고 끔찍이 아꼈던 의경세자(1438∼1457년)가 요절하고 궁을 떠나게 된 며느리와 손주를 가엽게 여겨 지어준 집이다. 임진왜란으로 피난 갔던 선조가 한양에 돌아오니 모든 궁궐이 소실돼 월산대군의 사가를 임시 거처로 사용하면서 행궁(行宮)이 됐고, 1608년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한 뒤 1611년 10월 정식으로 경운궁(慶運宮)이 됐다. 1615년 광해군 때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겨 빈 궁궐이 됐고,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도 이곳에서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며 더욱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그러다가 1895년 을미사변으로 아관파천을 했던 고종이 1897년 러시아 영사관에서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로 새롭게 즉위식을 했다. 당시 지금의 조선호텔 자리에 원구단이 조성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경운궁은 정궁이 됐다. 고종이 황제로 즉위를 한 곳이기에 중화전 월대를 올라가는 계단 가운데에 있는 돌에는 조선의 궁궐에서 유일하게 황제의 상징인 용이 새겨져 있고 중화전 창호에도 황제를 상징하는 노란색을 채색한 것이 특징이다. 근대 건축물인 서양식의 대규모 석조전을 건립하며 조선 근대화의 마지막 불꽃을 지폈지만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이양하면서 현재의 이름인 덕수궁(德壽宮)으로 바뀌었다.

망국(亡國)의 왕으로 덕수궁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생활하던 고종에겐 큰 기쁨이 있었으니, 바로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던 덕혜옹주(1912∼1989년)의 탄생이다. 고종은 고명딸이자 늦둥이로 태어난 덕혜옹주를 얼마나 아꼈는지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에서 키웠으며 조금 자라자 덕혜옹주를 위해 덕수궁 준명당에 유치원까지 마련하고 사대부 가문의 또래인 딸들로 원생을 구성했다. 함녕전과 준명당은 150m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오가다가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가마를 타고 다니라고 했으니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알 것 같다. 그뿐만 아니라 아장아장 귀엽게 걸어 다니는 덕혜옹주가 혹여나 높은 준명당 기단에서 떨어져 다칠까 염려한 고종이 난간을 설치해 지금도 그때의 흔적으로 기단 상판에 구멍이 파여 있는 걸 볼 수 있다. 시아버지의 사랑으로 처음 세워졌던 곳이 아비의 사랑으로 그 끝을 맺으니 그 사랑의 애절함이 잎새에 부는 바람에 지금도 실려오는 것 같다.

이규혁 건축가·한옥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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