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밤하늘의 우리 별

2024-10-16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지난여름 몽골행 비행기에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엄청 많이 타고 있었다. 그들에게 왜 몽골에 가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필자처럼 몽골 밤하늘의 별을 보러 간다고 답을 한다고 한다. 필자도 그렇게 친구들에게 떠들었다. 그런데 정작 몽골 하늘에 진짜 우리 한국인이 별이 되어 높이 떠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 있는 그의 묘비를 보지 못했다. 관광을 떠나기 전에 미리 알았으면 일정을 잡았을 터인데 그리 못한 것이 지금 생각하면 무척 죄송하다. 다행히 부산에 사는 친구들이 이 한국인의 기념공원을 찾아 묘비에 헌화하고 왔다고 사진을 보내왔다. 부끄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해서 이 몽골하늘의 별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그의 이름은 이태준이었다.

조선왕국에 외세가 몰려오던 1883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한 이태준은 어린 시절 한학을 배우고 24살인 1907년엔 세브란스 의학교에 입학해 3년 만에 졸업한 의사였다. 우리 국권이 일본에게 막 넘어가는 시기에 세브란스 의학교 재학시절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고 있던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선생을 만난 것으로 그의 생애가 확 바뀐다. 도산은 이태준을 최남선에게 소개하여 이태준은 애국계몽단체인 신민회의 청년학우회에 가입하게 된다. 이때 일본이 우리 국권을 강탈하자 애국 청년들은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커다란 기대를 걸고 중국으로 망명하게 되는데 이태준도 중국 남경으로 간다.

이태준은 남경으로 왔지만, 여비가 끊어진 데다가 언어장벽 때문에 고생하다가 중국인 기독교도의 도움으로 기독회의원(基督會醫院) 의사로 힘들게 지냈는데 안창호 선생에게는 편지로 연락을 게속한다. 그러다 두 살 위의 독립운동가인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이 1913년 국내에서 탈출해 상해로 오자 김규식이 몽골지방에 비밀 군관학교를 설립한다는 계획을 듣고는 그와 함께 1914년 초 몽골의 고륜(庫倫, 지금의 울란바토르)로 간다.

몽골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국 청나라가 무너지자, 독립을 선언했지만 다른 나라로부터 독립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군관학교를 세우려던 김규식과 이태준은 한국의 지하조직에서 약속한 자금이 도착하지 않아 학교 설립을 포기하여야 했고 이태준은 그해 가을에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병원을 개업해서 의사로서 활동하게 된다.

당시 몽골인들은 라마교의 영향 아래 병에 걸리면 기도를 드리고 주문을 외우는 재래의 치료법만 알고 있던 때였다. 이때 근대적 의술을 펼쳤으니, 이태준의 성가가 매우 높아져서 드디어는 몽골왕궁에 출입하게 되고 몽골의 국왕인 보그드 칸(Bogd Khan)의 어의(御醫)가 되는 등 몽골인들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특히 당시 몽골인들의 7, 8할이 감염되었던 화류병(花柳病)을 없애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함으로써, ‘까우리(高麗) 의사’ 이태준은 고륜 일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몽골을 방문한 여운형의 회상이다.) 몽골인들의 이태준에 대한 존경심은 ‘신인(神人)’이나 ‘극락세계에서 강림한 여래불(如來佛)’을 대하듯 했다고 한다.

1919년 7월 몽골국왕인 보그드 칸(Bogd Khan)은 이태준에게 국가훈장을 수여하였다. 이 국가훈장은 ‘귀중한 금강석’이란 뜻을 가진 ‘에르데니-인 오치르’라는 이름의 훈장으로써 제1등급에 해당하는 훈장이었다. 몽골정부가 근대의술을 몽골인들에게 널리 베푼 이태준의 뛰어난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이태준이 훈장을 받은 사실은 1919년 11월 11일자 『독립신문』 기사에 보도됨으로써 한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근대적 의술을 베풀면서 몽골사회에서 두터운 신뢰를 쌓은 이태준은 각지의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연락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주요한 비밀 항일활동에서 큰 공적을 남겼다. 특히, 장가구(張家口)에 십전의원(十全醫院)을 개업한 김현국(金賢國, 1916년 세브란스의학교 졸업)과 긴밀히 연락을 하면서 장가구와 고륜 사이를 오가는 애국지사들에게 숙식과 교통을 비롯한 온갖 편의를 제공하였다. 또한 이태준은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는 김규식에게도 2천 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의 생애를 결정지은 사건은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자금 40만 루불의 금괴를 받아 상해 임시정부로 수송하는 작전을 주도한 일이다. 1920년 러시아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레닌 정부는 반제국주의를 명분으로 세계의 약소민족과 국가에 대한 지원을 선언하였고, 이에 이동휘가 결성한 좌파독립단체인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과 상해임시정부는 레닌정부를 접촉하여 200만 루블을 지원받기로 하고 1차로 40만 루블에 해당하는 금괴를 받게 된다.

이태준은 이때 우리 대표들이 모스크바에 가서 교섭하는 것을 도와주고 이 금괴가 울란바토르에 도착하자 이 가운데 4만 루블을 직접 북경으로 전달하려 하다가 당시 몽골에 처들어와 닥치는 대로 살육과 약탈을 일삼던 러시아 백위파군(軍)의 로만 스테른 부대에 붙잡혀 이듬해 처형되고 만다. 체포되기 바로 전에 1차분 수송을 성공적으로 도와준 이태준은 북경에서 의열단 단장인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고 우수한 폭탄제조기술자인 항가리인 ‘마쟈르’를 의열단에 소개하기로 하고 고륜으로 돌아갔다가 곧바로 참변을 당한 것이다.

이태준의 아까운 삶은 소설가 박태원(朴泰遠)이 잘 묘사헸는데, 《약산과 의열단》이란 소설에서 고륜으로 돌아간 이태준이 끝내 러시아 백위파 운게른 스테른베르그 부대에 잡혀 피살된 뒤 마쟈르가 홀로 북경으로 와서 김원봉을 찾게 되는 감동적인 과정을 매우 극적인 필치로 서술하여 놓았다. 마침내 마쟈르가 질이 우수한 각종 폭탄을 성공적으로 제조하게 됨으로써 의열단은 더욱 효과적인 항일투쟁에 착수하게 된다. 마쟈르는 의열단의 폭탄운반에도 참여하였으며, 그의 도움으로 제조된 폭탄들은 황옥경부(黃鈺警部) 사건, 김시현(金始顯) 사건을 비롯한 의열단의 파괴공작에 활용되었다.

돌이켜 보면 이태준은 몽골에서 혁명운동에 참여한 인물로서 한국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한국근대사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태준의 원래 이름은 원일(元一)이고, 호는 대암(大岩)이다. 몽골정부의 공식문서에는 “고려국 국적민 의사 리다인”으로 나오는데 ‘다인’은 이태준의 호인 ‘대암’을 몽골어로 표기한 것이다. 당시 이태준이 본명 대신에 호인 ‘대암’을 사용했고, 몽골에서도 그렇게 통용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독립을 넘어 몽고를 위해서도 큰일을 한 인물로서 그의 삶은 국제적으로 빛나고 있다. 1921년 몽골을 방문한 여운형은 이렇게 몽골여행기에서 이렇게 썼다고 한다.

“이 땅에 있는 오직 하나의 이 조선 사람의 무덤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하야 젊은 일생을 바친 한 조선청년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였다.”

이태준의 무덤이 자리 잡은 곳은 현재 울란바토르의 자이승 전망대가 있는 구릉의 서북 경사지 일대로 추정되었디. 2001년 7월 이태준 기념공원이 이곳에서 준공되었다. 몽골정부가 제공한 2천2백 평의 터에 연세대 의대동창회가 비용을 조달하여 준공되었다. 2010년에는 몽골 한국대사관의 주도로 기념관이 건립되어 몽골을 여행하는 한국관광객들이 많이 들린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만 몰라서 못 갔으니 참으로 죄송한 일이다.

이태준의 삶은 단순히 일본에 대한 항일운동의 차원에서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국적과 인종을 뛰어넘는 보편적 인간 사랑을 실천한 숭고한 것이었다. 우리 정부도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국광복을 위해 항일운동의 최전선인 중국과 몽골에서 활동하였던 이태준은 1921년 몽골 하늘의 별이 되어 백년 이상 몽골 하늘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100여 년 나라가 없던 시기에 오로지 나라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삶을 바친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삶을 다시 되새기며 그 후손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우리들이 다시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해 본다.

사진 제공: 이기룡[한국드론사진가협회] , 국가보훈처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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