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음모론을 넘어서는 시민역량

2025-03-31

하민회 (이미지21대표, 미래기술문화연구원장)

해도 너무 한다 싶다. 연말부터 시작된 어수선한 정국, 나날이 심해지는 정치적 갈등에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피곤한 지경인데 산불까지. 며칠이 지나도록 잡히지 않는 불씨에 속이 타 들어가는데 음모론까지 등장했다.

요지는 잇따른 산불이 자연재해가 아니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개입했다는 것인데 그 대상이 정치적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 한쪽에서는 간첩, 중국 공산당의 방화를 의심하고 다른 쪽에서는 강력한 불의 기운으로 악운을 밀어내는 일종의 호마 의식이 치러진 것이라 주장한다.

근거도 출처도 명확하지 않지만 불안과 혼란을 가중시키기엔 충분하다. 여기에 북한 특수부대가 잠복해 공격 시기를 노리고 있다느니 경찰에 중국 공안들이 다수 침투해 있다느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각종 설들이 난무한다. 재난마저 음모론의 땔감으로 쓰이는 현실이 우리 사회의 극단적 갈등이 위험수위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정치적 음모론은 주로 정치적 불안정, 사회적 불만, 정보의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최근에는 소셜미디어 알고리즘도 한 몫 거든다. 개인의 심리적 상황도 작용한다. 연구에 의하면 외로울수록, 수면의 질이 낮을수록 음모론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은 누구나 음모론에 끌릴 수 있다.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고 예측하려면 단순한 설명이 필요하다. 흑이다 백이다 명확해야 판단을 내리기 쉽고 불확실성에서 벗어나 심리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명확하게 선을 그을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다양하고 복잡한 상황들이 존재하고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설명되지 않는 우연도 있다. 어쩌면 흑과 백 이상으로 큰 영역을 차지하는 건 회색일지 모른다.

정치적 불확실성과 사회적 피로감이 겹치면 대중은 허위정보에 압도당할 수 있다.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다는 두려움은 시야를 좁게 만들어 비현실적이고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자연스럽게 '적'이 등장한다. 예측 불가한 위협보다 구체적인 '악의 세력'을 설정하는 것이 통제력을 찾는데 용이한 탓이다. 무의식적 방어기제가 집단적으로 작동하는 셈이다.

음모론을 더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반복, 확산시키는 것은 소셜미디어다. 음모론자들은 정통언론을 케케묵은, 통제가 가능한 언론으로 폄하하면서 그들을 통한 '공식 발표'는 믿을 수 없으니 현장에서 직접 밝혀낸 진실(엑스, 유튜브)를 보라고 주장한다. 마치 사이비교주가 자신만을 맹신하도록 세뇌하듯 갖은 허구적인 논리를 동원해 증명하고 또 증명하며 믿음을 강화한다.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은 음모론의 확산을 돕는다. 공신력이 높은 정보보다 사용자가 관심을 보인 정보, 사용자와 관계가 있는 (친구, 팔로워, 구독) 사람이 올린 정보를 우선적으로 제공한다. 개인화된 필터링 탓에 사용자는 자신의 신념에 부합하는 콘텐츠만 보게 되고 자신의 견해와 같은 동질적 집단만 접하게 되면서 점점 더 크고 강한 목소리에 익숙해진다. 필터 버블이고 에코 챔버 (반향실 효과)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동질 집단의 세상 속에 갇혀버리는 셈이다.

정보에 대한 불균형 못지 않게 과잉정보나 잘못된 정보이해도 음모론의 발생에 영향을 미친다. 하루에 그 많은 산불이 동시다발적으로 날 수 없다는 상식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2015년부터 최근 10년간 3~4월에 전체 산불의 46%(251건)가 발생했다. 심지어 2002년 식목일엔 하루 동안 63건의 산불이 발생한 적도 있다.

건조하고 강한 바람이 부는 봄철은 산과 들에 겨우내 메마른 풀·낙엽 등이 남아 있어 산불 발생 및 확산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 산림의 대부분이 침엽수 중심으로 밀집도가 높고 수분 보유력이 낮은 '구조적인 가연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진화생물학자인 최재천 교수는 최근 유튜브를 통해 이번 산불이 기후위기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며 보다 심각하고 진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5명 사망, 중경상 54명.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의하면 지금까지 대략 집계된 산불 구역은

올해 초 세계를 놀라게 한 '캘리포니아 남부 산불'의 약 2만3200ha을 훌쩍 뛰어 넘는 4만5157헥타르(ha).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산불 재난이다.

이 비극적인 재난 앞에서도 우리는 극단적으로 갈라져 목소리를 높이며 서로를 탓하기 바쁘다. 정치적인 갈등이 정서적 갈등이 되어버렸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4 한국의 사회지표'에 따르면, '보수와 진보' 간 사회갈등을 심각하게 느낀다는 응답이 77.5%로, 조사 대상 8개 항목 중 가장 높았다. 사회적 고립감 관련 지표도 전년보다 악화했다. 조사시점이 지난 해 8~9월이니 비상계엄 이후 정치적 혼란 상황은 반영되지 않은 수치다.

우리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를 살고 있다. 진실 속에 교묘하게 섞인 거짓과 거짓 속에 숨겨진 진실이 공존한다. AI가 일반화되면 우리를 현혹하는 더 많은 정보들이 등장할 것이다. 쏟아지는 과잉 정보 속에서 자칫 소셜미디어가 작동하는 방식에 의해 개인의 사회 정체성이 형성될 수도 있다.

알고리즘은 진실엔 관심이 없다. 오로지 분노, 욕망, 공포를 자극해 사용자 참여를 늘리는데 집중할 뿐이다. 자신의 가치관과 정체성을 훼손당하지 않으려면 자기 판단이 옳은 지 수시로 비판적으로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막연한 믿음보다는 일단 의심하는 태도가 현명하다. 정보를 대할 때는 경계심을 가지고 진위여부를 파악하고 출처와 전달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이 정보로 인해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손해를 보는지 차근차근 따져보는 것도 필요하다.

명심해야 한다. 음모론은 진실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팔기 위한 것이고 적지 않은 정치인들이 음모론을 악용해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 든다. 다수의 사람들이 얻은 정보를 그저 소비할 뿐 사실 확인에는 무관심하다.

머지않아 가짜와 진짜, 현실과 가공, 산한 의도와 악의를 구분할 수 있는 비판적인 사고가 민주주의를 지키는 필수 시민역량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민회 이미지21대표(미래기술문화연구원장) =△경영 컨설턴트, AI전략전문가△ ㈜이미지21대표 △경영학 박사 (HRD)△서울과학종합대학원 인공지능전략 석사△핀란드 ALTO 대학 MBA △상명대예술경영대학원 비주얼 저널리즘 석사 △한국외대 및 교육대학원 졸업 △경제지 및 전문지 칼럼니스트 △SERI CEO 이미지리더십 패널 △KBS, TBS, OBS, CBS 등 방송 패널 △YouTube <책사이> 진행 중 △저서: 쏘셜력 날개를 달다 (2016), 위미니지먼트로 경쟁하라(2008), 이미지리더십(2005), 포토에세이 바라나시 (2007) 등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