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마을약사가 있다

2025-03-27

“진짜 약국을 만들자!”

인문학공동체 공부가 마을경제에 꽂혔을 때 작업장을 만들었고, 청(소)년에 꽂혔을 때 마을학교를 만들었던 것처럼, 양생이 새로운 화두가 되었을 때 마을약국을 떠올렸다. 때마침 회원 중에 약사도 있지 않은가. 무모함에 가까운 용기, 돈은 쌓아두는 게 아니라 순환시켜야 제맛이라고 생각하는 윤리, 거기에 언제나 기꺼이 보태는 손들이 있으니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진짜 약국을 만들자. 처방전 조제 대신 상담을 위주로 하고, 약보다 일상의 변화를 더 중시하며, 자기 몸을 스스로 돌보는 사람들의 네트워크인 약국. 이른바 ‘사람과 글과 약이 있는 인문약방’이 우리 포부였다. 약국엔 영양제만큼이나 책을 진열했고, 약사와 손님을 구분 짓는 매대 대신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4인용 테이블을 놓았다. 마침내 이름을 ‘일리치 약국’이라 짓고, 이반 일리치의 얼굴을 크게 만들어 간판을 달았다. 뿌듯했다.

그러나 카센터 골목 귀퉁이에서, 병원 처방전도 받지 않는 고작 세 평 반의 작은 약국을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약국 간판을 보고 어쩌다 들어온 사람도 낯선 공간 배치에 당황해서 “진짜 약국이에요?”라고 묻곤 했다. 그래도 조금씩 이 이상한 약국에 대한 소문이 났다. 한 젊은 부부는 자신들이 먹는 한 움큼의 영양제를 들고 왔는데 약사가 그렇게 많이 먹을 필요가 없다고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주자 매우 기뻐했다. 한 시간 넘게 상담한 끝에 약이 필요 없다고 말하면 당황해서 상담료라도 내겠다는 분도 있었다. 우리 약사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의 몸과 마음의 상태에 대해 말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가 진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치유가 되어 돌아간다고 했다.

‘일리치 약국에 놀러와’라는 프로그램도 재밌었다. 수면장애·대사증후군 같은 특정 질환, 갱년기 같은 여성 몸에 대한 이슈, 다이어트나 좋은 죽음 같은 시대적 어젠다를 중심으로 4주 정도 함께 공부하는 방식이었는데, 책을 읽기도 하고 전문가 특강을 듣기도 했다. 수면장애 때는 워크북을 만들어 자신의 수면 패턴을 관찰, 셀프처방해 보는 워크숍을 열기도 했다. 이런 일들을 사부작사부작하다 보면 우리 약국이 거대한 의산복합체에 맞서는 작은 디딤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라고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이 되지 못하란 법도 없었다.

문제는 ‘매출’이었다. 월세 내고, 직원 세 명의 쥐꼬리만 한 월급 주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심지어 적자인 달도 늘어갔다. 어느덧 회의는 ‘매출’로 시작해서 ‘매출’로 끝이 나곤 했다. ‘양생’은 페이드 아웃(Fade Out) 되어갔다. 그러니까 마을양생 활동가인줄 알았는데 영락없는 영세 자영업자였던 것이다. 특히 약사의 고충이 컸다. 약국은 그간 공동체에서 실험했던 마을작업장이나 마을학교와는 달리, 하나부터 열까지, 그러니까 행정업무부터 상담과 실제 조제까지 모두 약사가 책임져야 하는 곳이었다. 공부할 시간이 있기는커녕 번아웃이 오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벌이는 최저생활비를 조금 웃도는 수준. 정말 죽거나 나쁘거나. 이런 식으로는 개인도 약국도 지속 불가능한 게 아닐까? 차라리 때려치울까? 그런데 공동체에서 마음과 돈을 모아줘서 만든 약국을 접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매출이 떨어질 때마다 분석이라 할 수도 없는 이야기를 끝없이 한다. 동네 상가들 대부분 하나 건너 하나는 비었어. 불경기야. 다들 영양제 하나라도 줄이고 싶을 거야. 모두 힘들고 어려운 그런 날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니 딱히 매출 신장의 비법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도, 지치지도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올해 약국의 모토는 ‘명랑한 약국’이다. 공부도 하고, 마을 사람들과 양생도 도모하고, 그 속에서 다른 ‘밥’을 만들면서 이 작은 마을약국을 지켜보자고 했다. 그 맨 앞에 고액 연봉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약사, 공부하고 글 쓰는 약사, 쌍화탕을 달이는 약사, 희망을 잃지 않는 약사가 있다. 우리에게는 그런 마을약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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