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남자’ ‘마초맨’의 시대는 저무는 걸까? 최근 미국과 유럽의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일명 ‘퍼포머티브 메일(Performative Male)’이란 남성상이 떠오르고 있다. 이들은 진보적인 여성의 취향에 맞출 법한 감성적인 옷차림과 행동을 세심하게 연출하며 ‘안전한 남성성’을 표방한다.
이달 초, 미국 시애틀 캐피톨힐 인근 한 공원에 수백 명이 모여 ‘닮은꼴 대회’를 열었다. 과거에는 티모시 샬라메, 페드로 파스칼 같은 유명인 닮은꼴을 찾았으나 이번 주제는 ‘퍼포머티브 메일’이었다. 대회 공동 진행자이자 미술 교사인 기네비어 운터브링크는 대회사를 통해 “퍼포머티브 메일은 유해한 남성성의 정반대 개념이라며 여성, 특히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좋아할 요소를 맞춰가는 남자 유형”이라고 설명했다.
퍼포머티브 메일의 전형적인 겉모습은 이렇다. 헐렁한 반바지에 잘 맞는 티셔츠, 오버사이즈 셔츠나 재킷을 걸치고, 어깨에는 미니멀한 에코백이나 토트백을 맨다. 가방에는 인기 아트토이 ‘라부부(Labubu)’ 인형을 매달고, 손에는 유명 여성 작가의 책이나 페미니즘 관련 책을 든다. 다른 손에는 커피보다는 요즘 ‘녹색의 금’이라고 불리는 말차 라떼를 든다. 취미는 필름 카메라 찍기 등 아날로그 감성에 푹 빠져있다. 음악 취향도 클레어(Clairo)나 로페이(Laufey) 같은 촉촉한 ‘감성 보컬곡’을 ‘줄 이어폰’으로 듣는다. 시각적 이해를 돕자면 옷 잘 입기로 유명한 영국 팝스타 해리 스타일스가 ‘인간 퍼포남’이라 불린다.

이 스타일은 요즘 2030 여성의 ‘이상형 체크리스트’를 하나씩 꼼꼼히 채우도록 설계된 룩이다. 남성 매거진 브리티시 지큐(British GQ)에서는 이를 두고 ‘힌지(데이팅앱) 시대 짝짓기 춤’이라고 표현했다. 단순한 패션이 아니라, 자신이 ‘유해하지 않고, 여성의 가치관에 공감할 수 있는 남자’임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일종의 ‘시그널’이다. 틱톡과 인스타그램에서는 퍼포머티브 남자끼리 누가 더 부드러운 음악 취향인지, 누가 더 희귀한 토트백을 가졌는지 경쟁하는 영상도 유행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이런 유행이 “겉모습만 진보적인 척하는 가식”이라는 비판과 함께 밈(meme)화되기도 했다. 각종 SNS 플랫폼에서는 길거리에서 퍼포머티브 남자를 포착해 올리는 ‘몰래 찍기’ 영상부터, 퍼포머티브 남자 흉내를 내는 패러디 콘텐츠도 활발히 제작되고 있다.
같은 유행은 아니나 국내에서도 ‘비슷한 기류’가 포착된다. 바로 ‘에겐남’이다. 여성 호르몬으로 대표되는 에스트로겐과 남성의 줄임말로 공격적이지 않고, 세심하며,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으로 호감을 얻는 남성상이다. 둘 다 ‘안전하고 편안한 성향’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공통점이 있다.
전문가는 최근의 흐름을 ‘사회적 시선보다 개인의 취향이 더 중요한 시대의 결과’로 해석한다. 청담하버드심리센터 최명기 원장은 “과거에는 남성 스스로 ‘남자답지 못하다’는 평가를 두려워했고, 여성들 역시 그런 남성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도록 학습된 측면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요즘 성소수자가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흐름처럼 이제는 ‘남성/여성스럽다’라는 구분이 힘을 잃고, 자신의 취향에 맞는 상대에게 호의를 보낸다. 이런 변화가 새로운 남성상을 만들어낸 배경”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