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개월치 약 값만 6000만 원 아닙니까. 더이상 딸에게 부담 주기 싫습니다.”
방광암 4기 환자인 A씨(60대)는 '파드셉(성분명 엔포투맙 베도틴)·키트루다(성분명 펨브롤리주맙)’ 병용요법을 한 차례 받은 후 주치의인 김인호 서울성모병원 종양내과 교수를 찾아가 약을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이 치료법은 전이성 요로상피세포암(방광암) 환자 임상결과 5년 생존율이 기존 치료제(11.7%)에 비해 2배 이상 높았다. 그런데도 A씨는 너무 비싼 약값 때문에 치료제를 바꾸길 원한 것이다. 파드셉·키트루다 병용요법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중증암질환심의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해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3주 기준 약값이 1000만 원에 달한다. 김 교수는 "환자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치료를 중단했다"며 "미국종합암네트워크(NCCN)가 파드셉·키트루다 병용요법을 방광암 1차 치료의 선호요법으로 권고했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보험적용이 안되면 그림의 떡"이라고 말했다.
항암제를 2개 이상 함께 투여해 치료 효과를 높이는 병용요법이 난치암 환자들의 희망으로 떠올랐지만 건보 적용 길이 사실상 막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함께 사용하는 약의 개발사가 다른 경우 관련 절차가 미비해 심평원의 보험 적용 심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보건복지부가 최근 기존에 건보가 적용되던 항암제와 새로 개발된 비급여 항암 신약을 함께 사용하는 경우 기존 건보 혜택이 유지되도록 급여기준을 개선해 일부 암환자들의 숨통이 트였지만, 혁신신약들끼리의 병용요법이 필요한 환자들은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의료계에서는 “국내 급여 체계가 항암 치료의 발전 속도를 반영하지 못해 신약 접근성을 제한한다”며 규제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8일 서울경제신문이 국회 건복지위원회 소속 이주영 개혁신당 의원실을 통해 단독 입수한 '2015~2024년 제약사가 상이한 항암신약 병용요법의 급여 적용 현황’ 자료에 따르면 병용요법 72건 중 급여 적용을 받은 사례는 화이자의 BRAF 표적항암제 '비라토비(성분명 엔코라페닙)'와 머크의 ‘얼비툭스(성분명 세툭시맙)’ 병용요법 단 1건에 불과했다.
정부는 현재 환자 부담을 줄이기 위해 치료 효과가 뛰어난 고가의 신약에 대해 제약사와 건보가 보험 약값을 분담하는 '위험분담제'를 시행하고 있지만 병용요법에 사용되는 신약의 공급사가 다를 경우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밀유지 계약에 따라 서로 다른 회사의 약물에 대한 경제성평가나 재정영향 분석이 어려운 데다 공정거래법에 의해 제약사 간 협의가 금지돼 재정분담안 협의가 어렵다. 고가의 항암제가 건보에 등재되면 약값의 95%가량이 지원돼 암환자들의 부담이 크게 줄어들지만, 건보 적용이 되지 않으면 수천~수 억원의 치료비를 환자가 모두 부담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낮은 경제성 평가 임계값(ICER)도 허들로 지목된다. ICER은 새 치료법이 기존 치료법보다 얼마나 더 효과적이며, 추가 비용이 적절한지를 평가하는 지표다. 서동철 중앙대 약학대학 교수는 "우리나라는 GDP 기준 적용 시 해외 대비 최대 ICER 임계값이 매우 낮아 대다수 신약들이 경제성 평가에서 정부의 허용치를 넘어간다"며 "질병의 위중도와 사회적 요구, 약물이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 임상적 혁신성을 고려해 ICER 임계값을 좀 더 탄력적으로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해외에서는 환자 부담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영국은 비용-효과비 임계값과 경쟁법으로 인한 가격 협상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관련법 준수를 전제로 제약사 간 가격논의를 허용한다는 성명을 냈다. 캐나다는 제약사 간 기술 기반 협상을 통해 병용요법의 적정 가격을 함께 결정하도록 허용했다. 라선영 대한암학회 이사장(연세암병원 종양내과 교수)은 "의학 발전으로 혁신 치료 옵션이 대거 등장하면서 암환자들의 생존 기간이 길어졌지만 제도는 여전히 구시대적 방식에 머물러 있다"며 "기다릴 시간이 많지 않은 암환자들을 위해서라도 고가의 병용요법에 대해 비용 부담을 줄이는 보완책이 논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