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에 담기 어려운 떡

2024-09-28

한 커뮤니티에 올랐던 글이 사회관계망서비스를 비롯해 뉴스로까지 퍼지면서 잠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지인들의 모임에서 누군가가 “이 정도면 떡을 치죠”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분위기가 말 못할 정도로 싸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발화자의 의도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뜻이었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전혀 ‘다른 뜻’을 떠올렸다. 부자연스럽게 조용해진 분위기를 어색한 웃음으로 마무리했다는 것이 주된 사연으로, 최근 몇년 새 불거진 문해력·어휘력 문제까지 소환하며 사회관계망서비스를 달궜다.

포털사이트 사전을 찾아보면 ‘떡을 치다’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①양이나 정도가 충분하다 ②(속되게) 남녀가 성교하다 ③어떤 일을 망치다. 앞서 언급된 사연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떠올렸던 ‘다른 뜻’이 이 중 무엇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만큼이면 떡을 치고도 남는다”라거나 “이번 시험 완전 떡 쳤어” 등으로 활용될 때면 어느 자리에서건 거리낌 없이 사용할 수 있겠지만 ②번 의미를 담은 표현이라면 공식적인 자리에서 대놓고 사용하기엔 적절하지 않다. 상대에 따라 눈치를 봐야 하는 민망한 표현이다. 혹자는 머릿속이 ‘음란 마귀’로 가득한 일부 사람들만 아는 관용적 표현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겠다. 아무 데서나 쓰기 쉽지 않은 ‘음지’의 말이긴 하나 실상은 대다수가 알고 있는 표현이다. 앞서 언급된 사연을 염두에 둔다면 ①~③의 의미 중 ②번이 가장 폭넓게 퍼져 있는지도 모른다.

성이나 성행위와 관련한 은어나 속어는 상당히 많다. 그중에서도 떡 혹은 떡을 치다는 표현은 성행위를 일컫는 말로 ‘저잣거리’에서 오랫동안 생명력을 누려왔다. 대중문화 콘텐츠에서는 떡메(떡을 치는 나무망치)를 치거나 떡방아를 찧는 모습으로 성행위를 익살스럽게 표현하며 유머 코드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임상수 감독은 십수년 전 영화 <바람난 가족>을 (자신이 만든)‘떡 영화의 완결편’이라 하며 ‘떡감독’임을 자칭하기도 했다.

혹시 이런 상상?

잔칫날 빠지지 않는

‘별식’으로 사랑

성관계 일컫는

‘은어’로도 쓰여

방아 찧는 소리

행위에 빗댄 재치

생명력 극대화한

‘풍년’ 기원 의미

떡은 예로부터 잔칫상에 빠지지 않는, 일상성을 뛰어넘는 별식으로 사랑받아왔다. 맛 좋고 귀한, 그 특별한 음식이 어쩌다 성적 속어로 자리 잡게 됐을까. 정확한 유래와 시점은 알 수 없다. 1983년 출간된 윤흥길의 소설 <완장>에 “마누라가 있어야 안방에서 떡을 치죠”라는 대목이 나온 것을 보면 그 이전에도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말 절대지식>을 쓴 국어학자 김승용은 “떡메를 칠 때 나는 소리와 섹스를 할 때 나는 소리 모두 ‘철썩철썩’이나 ‘떡떡떡’으로 들려 이 같은 표현을 사용하게 된 것 같다”면서 “1960~70년대 군인들이나 일부 집단에서 비속어로 쓰던 말이 퍼지게 되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떡을 친다고 말할 때 때론 한 손을 말아 쥐어 생긴 구멍에 다른 손 손바닥을 때리는 경우도 많은데, 이는 행위와 소리를 비슷하게 묘사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전 문헌에도 성적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떡을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넣고 찧는 기구인 방아는 특히 빈번하게 사용됐다. <심청전> <춘향전> <변강쇠전> 등 고전소설이나 판소리에는 방아를 비유적으로 사용한 육담이 꽤 많이 나온다.

“너는 죽어 방아 확이 되고 나는 죽어 방아고가 되어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의 강태공 조각 방아 그저 쩔구덩 찧거들랑 나인 줄 알려무나.”(<열녀춘향수절가>에서)

여기서 확은 우묵한 절구, 고는 절굿공이를 일컫는다.

“이 방아 저 방아 다 고만두고 칠야삼경 깊은 밤에 우리 님이 찧어주는 가죽방아가 제일 좋다더라. 어유아 방아야, 떨그렁 떵 자주나 찧어라, 어유아 방아야.”(<변강쇠전>에서)

신재효 본 <심청가>에도 “이방아 저방아 다 버리고 월침침 야삼경에 우리 님 혼자 와서 가죽방아만 찧는다”는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또 심봉사가 동네 아낙들과 노골적인 성적 농담을 주고받는 매개체도 방아다.

조상들이 고된 농사일을 하며 불렀던 대표적인 노동요 중 하나는 ‘방아타령’이다. 지역별로 각양각색의 가사와 형태로 전승되어왔는데, 역시 성적인 의미를 담은 내용들도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은 남녀의 성적 결합을 상징하는 방아 찧기를 묘사함으로써 생산성과 생명력을 극대화하여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농업이 가장 중요한 경제적 토대였던 조선시대에는 노동력이 무엇보다 주요한 자산이었기 때문일 터다.

온종일 절굿공이를 들고 곡물을 찧었던,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농사일을 했던 사람들은 민초들이었다. 곡식을 찧어 떡을 만들고 풍요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노래했지만 그들 중 풍요롭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됐을까. 경사 때나 특별한 날에만 구경할 수 있던 떡은 그들에겐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었을 것이다. 신라시대 거문고 명인 백결 선생은 몹시 가난했다. 옷을 100군데나 기워 입었던 데서 얻은 별명이 ‘백결’이었다. 섣달그믐날 집집마다 떡방아를 찧으며 떡 만드는 모습을 보고 부러워하던 아내를 위해 그는 거문고로 방아 찧는 소리를 들려주며 위로했다.

농경사회였던 한반도에서 떡의 역사는 오래됐다. 삼국시대가 정립되기 이전부터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식문화사전>에서는 “상고시대의 출토물인 시루나 벽화, 옛 문헌의 기록들로 쉽게 짐작할 수 있다”면서 “떡은 곡물을 익혀 먹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생겨났고, 제천의식에도 쓰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신라시대 초기에는 떡이 왕위를 결정하기도 했다. 신라 2대 남해왕이 죽은 뒤 아들인 유리와 사위인 석탈해는 왕위를 서로에게 양보했다. 그러다 석탈해는 “이가 많은 사람이 지혜롭고 덕망이 있으므로 떡을 물어 누가 더 잇자국이 많은지를 보자”고 제안했다. 떡을 깨물어 확인한 결과 유리의 이가 더 많아 신라 3대왕 유리 이사금이 된다. 여기서 ‘이사금’은 잇금(치리 齒理, 즉 이빨의 자국)을 의미한다는 것이 설화에 전해지는 이야기다.

왕의 재목을 결정하고 제천의식에도 사용됐던 떡은 고대로부터 귀한 음식이었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궁중 연회에서 잔치 분위기를 돋우던 것이 떡이었다. 각종 음식을 높이 쌓아올린 고임상에서도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는 메뉴가 여러 가지 떡을 쌓은 ‘각색병’이다. 귀하면서도 친숙한 떡은 우리 조상들의 일상에 깊이 자리 잡았다. 떡과 관련한 속담이 유독 많은 것도 그런 8이유에서일 것이다. ‘웬 떡이냐’는 뜻밖의 횡재를, ‘밥 위에 떡’은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로 좋은 상태를 의미한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앞집 떡 치는 소리 듣고 김칫국부터 마신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다. 수백가지에 이르는 떡과 관련한 속담에서 떡은 대개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떡은 만드는 방법에 따라 크게 4가지로 나뉜다. 찌는 떡, 치는 떡, 지지는 떡, 삶는 떡이다. 찌는 떡은 시루에 안쳐 쪄낸 것으로, 시루떡이라고도 한다. 백설기, 두텁떡, 증편을 비롯해 빚어서 찐 송편 등이 이에 해당한다. 치는 떡은 말 그대로 ‘떡을 치는’ 과정이 필요한 떡이다. 쪄낸 곡물을 절굿공이나 떡메로 치는 것은 반죽을 차지게 만들기 위해서다. 인절미나 가래떡이 대표적이다. 지지는 떡은 반죽을 빚어 기름에 지진 것이다. 화전이나 전병이 여기 포함된다. 광장시장에서 많이 파는 부꾸미도 지진 떡이다. 삶는 떡으로는 찹쌀을 반죽해 물에 끓인 뒤 고물을 묻힌 경단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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