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마다 작동하는 ‘부정의 정치’

2025-03-10

지난주 수소 산업 육성에 관한 포럼이 서울대학교 국가미래전략원에서 열렸다. 인사말을 하러 간 김에 귀동냥이라도 하려고 앉아 있다가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산업 동향과 기술 진전을 다룬 뒤 우리 상황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자 정치가 등장했다. 발표자들이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수소 자동차나 수소 산업에 관심을 표했던 것이 이번 정부에 들어와서는 오히려 정책적 무관심을 낳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국가적으로 아무리 중대한 과제라고 해도 전임자의 것이라면 모든 걸 지워버리려는 ‘부정의 정치’가 여기에도 작동한 것이다.

대통령 바뀔 때마다 전임자 지우기

정책 단절로 산업 성장·발전 지장

단기 성과 매달려 장기 과제 외면

국가경쟁력 위해서도 개헌은 필수

이런 일은 수소 산업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열정을 갖고 추진했던 녹색성장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버림을 받았다. 정책의 우선순위가 밀린 게 아니라 아예 부정되었다. 5년 동안 많은 노력과 비용을 들여 축적된 성과가 오로지 전임자의 관심사라는 이유로 통째로 버려진 것이다. 정당 간 정권교체가 아니라 같은 정당 출신 대통령이었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전임자 지우기’의 희생물이 되었다.

대통령제는 대통령 1인에게 통치가 위임되는 체제라서 대통령 한 사람의 판단과 뜻에 따라 정책이 좌지우지되기 쉽다. 최근 미국에서 보듯이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전임 바이든 대통령의 정책을 뒤집고 있다. 그래도 미국은 연방제 국가라서 트럼프의 뒤바뀐 정책이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외국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만, 실제 미국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 한 사람의 뜻이 A부터 Z까지 국가의 모든 정책 방향을 결정한다. 지난 정부에서 겪은 것처럼, 대통령이 영화를 보고 혹시 모를 원전 사고에 두려움을 느낀 것만으로도 그간 착실하게 역량을 축적해 온 원전 산업의 전 생태계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 이처럼 새 대통령이 취임할 때마다 생겨났던 정책 추진의 변덕스러움이 한국 산업의 성장과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사실 한국이 이만큼이나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1962년부터 일곱 차례나 추진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덕택이다. 장기적 관점에서 경제개발의 청사진을 갖고 5년마다 당면한 목표를 착실하게 성취해 왔다. 국가 발전에 대한 체계적 계획을 짜고 오랜 세월에 걸쳐 일관성 있게 추진한 결과 한국 경제가 성장해 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통치 구조하에서는 그러한 장기적 국가 발전의 그림을 그릴 수도 없고, 설사 그런 그림이 있다고 해도 그걸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실현할 힘도 찾을 수 없다. 현 체제에서는 ‘5년짜리’ 정책만 추진되고 있고, 그중에서도 임기 중 가시적 성과가 나올 만한 단기적 과제에 집중하고 있다. 그나마도 임기 중 선거 패배나 스캔들로 대통령의 리더십이 흔들리면 중도에 정책 추진력이 약화하곤 했다.

이 때문에 우리 사회는 정체되어 있다. 국가적으로 산적한 과제가 있지만 그걸 해결해 낼 유능한 정치 리더십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구 감소나 지방 소멸이 국가 생존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라는 걸 예전부터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그동안 한국의 발전을 주도해 온 반도체를 포함한 핵심 과학기술 분야에서 중국이 한국을 추월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지만, 앞서 말한 수소 산업의 경우처럼, 우리의 대통령제는 산업과 과학기술의 발전을 오히려 저해하고 있다. 또한 승자독식의 정치 시스템은 사회를 갈라놓고 갈등을 조장하면서 발전을 위한 우리의 잠재적 역량을 약화시키고 있다. 이처럼 사회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지 못하면서 젊은 세대는 불안해졌다. 기성세대가 어렸을 때 미래의 꿈을 물으면 항상 높은 순위에 놓였던 직업이 과학자였는데, 이젠 편하고 안정적인 자리만 선호한다. 도전과 혁신의 정신도 사라져 가고 있다.

1987년 당시 한국의 1인당 소득은 3300달러 수준이었다. 오늘날 3만 달러 수준으로까지 성장하게 된 것은 87년 민주화에 의한 정치 구조의 변화와 그에 따른 개방과 자율이 이뤄낸 성과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이들이 느끼는 대로 우리 사회는 다시 한계에 직면했다. 우리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한국의 미래는 앞으로 하락할 일만 남았다는 이른바 ‘피크 코리아 (Peak Korea)’의 우려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한 사람이 모든 정책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통치체제, 이전에 축적된 성과가 부정되고 5년마다 매번 새로운 것이 추진되는 정책 시스템, 그리고 5년만을 바라보는 단기적 관점으로는 미래의 발전을 기약할 수 없다. 현행 통치 구조를 바꿔야 하는 것은 단지 무능한 대통령과 정쟁에만 몰두하는 무책임한 의회라는 정치의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산업과 과학기술을 둘러싼 더욱 거칠어진 국제 경쟁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반드시 개헌을 성사시켜야 한다.

강원택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장·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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