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후 대선에서 ‘여론조사 떴다방’이 선거판 휘저을 우려 고조
비공개 여론조사 규제법안 다수 발의…여심위도 제도 개선 나서

[주간경향] 지난해 치러진 4·10 총선. 지역구 선거를 준비하던 A선거캠프는 공표용 여론조사 외에 의심스러운 비공표용 여론조사 여러 개가 지역에 돌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비공표용 여론조사가 도는 것이 찜찜했던 캠프는 추적에 나섰고, 경쟁 캠프의 의뢰를 받은 한 여론조사업체가 특정 지역에 10번이 넘는 비공표용 여론조사를 집중적으로 실시한 사실을 확인했다.
해당 캠프 관계자는 “비공표용 조사가 여러 번 돌면 공표용 여론조사에도 영향을 미치고 결국 여론에도 영향을 미친다”면서 “이대로 방치해선 안 되겠다 싶어서, (선거에서는 승리했지만) 여론 왜곡 혐의로 경찰에 해당 업체를 고발했다”고 말했다.
선거철만 되면 주르륵 나타났다 사라져
검찰이 지난 대선과 지방선거 과정에서 이른바 ‘명태균 게이트’에 연루된 정치인에 대한 수사를 본격화하면서 명씨와 이들 정치인의 접점이 된 비공표용 여론조사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조기 대선 실시 가능성이 높은 올해와 지방선거가 있는 내년에, 현재의 법적 미비점을 뚫고 ‘제2, 제3의 명태균’이 다시 선거판을 휘저을 수 있다는 우려도 가시지 않고 있다.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한 여론조사는 ‘갤럽’처럼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된 선거 여론조사기관이 실시하는 자체 조사나 언론사의 의뢰를 통해 실시되는 보도용 여론조사가 대부분이다. 조사기관에 따라 공정성 논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지만, 적어도 조사설계서와 설문내용, 표본추출, 결과분석 등을 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여심위)에 신고해야 하는 만큼 조작 논란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반면 비공표용 여론조사는 공표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후보자나 캠프가 자체적으로 의뢰해 받아보는 조사를 말한다.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만큼 선관위에 등록된 선거 여론조사기관이 아니어도 조사를 실시할 수 있다. 엄격한 공직선거법의 감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여론조작 논란에 자주 휩싸이기도 한다.
호남 지역 한 의원실 관계자는 “선거철이 되면 (미등록 여론조사업체들이) ‘떴다방’처럼 주르륵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우리가 (여론조사) 몇 번을 얼마에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수도 없이 나타난다”면서 “인터넷매체를 끼고 있으면 비공표용 여론조사를 할 때 선관위에 여론조사 내용 신고를 안 해도 되니 (인터넷매체 수만 따져봐도) 얼마나 많겠느냐”고 반문했다.
명씨의 경우도 미래한국연구소라는 미등록 여론조사업체와 투데이경남이라는 매체를 이용해 국민의힘 대선 경선에서 비공표 여론조사를 돌렸다. 이 관계자는 “의원들은 자세히 모르지만 (밑에서는) 이런 제의를 수도 없이 많이 받는다”며 “여론조사를 잘 모르면 이런 제안에 혹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여론조사업체의 솔깃한 제안에 넘어가고 나면 이때부터는 사실상 준법과 탈법의 경계 선상에 놓이게 된다. 비공표 여론조사의 사전 조건이 ‘공표하지 않는다’인 만큼 외부로 흘러나가는 순간부터 바로 위법 논란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밖으로 흘러나온 비공표용 여론조사는 다양한 형태로 선거판을 오염시킨다. 이 관계자는 “비공표는 옆의 한 명에게만 말을 옮겨도 원칙적으로 비공표가 아니게 된다”며 “선거기간에 지라시 형태로 ‘누구 몇%대 누가 몇%더라’ 식으로 흘러나오는 것 상당수가 비공표 여론조사를 주워들어서 만든 것이거나, 아니면 일부러 ‘너만 봐라’ 이런 식으로 흘려서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것”이라고 했다.

명씨의 사례처럼 정당의 후보 선출 과정부터 개입해 의뢰인의 당선을 돕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정당에서 본선에 앞서 후보자 경선을 실시하는 경우, 공식 여론조사가 진행되는 기간을 타깃으로 비공표 여론조사가 돌면, 이를 공식 조사로 착각해 이미 응답한 사람들이 더 이상 공식 여론조사에 응답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다. 명씨도 당원 명부를 확보해 사전 ARS 조사를 돌려 각각의 성향을 파악한 뒤, 정당 후보 선출을 위한 공식 여론조사가 실시되는 날 반대편 후보를 지지하는 당원들에게만 비공표 여론조사를 미리 돌렸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위험성 알면서도 비용 때문에 눈 돌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표본이나 가중치를 바꿔 원하는 대로 결과물을 뽑아내는 여론조작의 단계가 된다. 명씨는 종종 스스로를 ‘처방까지 하는 마케터’라고 불렀는데, 표본이나 가중치 등을 재가공해 여러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고 최종적으로 후보자가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는 의미다.
지난해 총선에서 비공표용 여론조사를 통한 왜곡 혐의로 고발당한 여론조사업체 B사의 경우 ‘○○신문’과 함께 지역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해당 업체는 당시 ‘맞춤형 과학선거 컨설팅, 유권자 DB와 읍면동 단위 선거 정보 제공’ 등의 문구로 지역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영업에 나섰다.
이 업체는 당시 ▲선거전략 수립을 위한 2~3회 여론조사 ▲경선전략 수립을 위한 선거구 대의원 조사 2~3회 ▲해당 지역 유권자 1회 지지도 추이 분석 및 당선 가능성 예측 ▲열세·우세 지역 상세 파악을 위한 지역 유권자 4~5회 여론조사 실시를 후보자들에게 제안했다. 이 가운데 선거구 대의원 조사 등은 단순한 판세 정보나 분석을 넘어 사실상 선거운동에 준하는 적극적인 개입으로 의심된다는 게 의원실 설명이다. 또 이 업체가 이 같은 내용을 홈페이지에 버젓이 게시할 정도로 이를 일반적인 영업행위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의원실은 전했다.
그렇다면 정치인들은 이런 위험성과 허술함을 알면서도 왜 비공표용 여론조사에 쉽게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일까. 명씨의 주장과 검찰 수사를 종합하면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해 오세훈 서울시장, 홍준표 대구시장,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 등 쟁쟁한 정계 인사들이 이번 여론조사 게이트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것으로 나온다.
한 재선 의원실의 여론총괄 비서관은 ‘비용’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선거비용에 법정 상한이 있는데 한정된 재원을 선거 내내 여론조사에만 투입할 수 없다는 얘기다.
특히 선거캠프에서 실시하는 비공표용 여론조사 외에 캠프나 후보자가 의뢰하지 않은 이른바 ‘대납’ 여론조사가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후원자 혹은 지인, 측근이 비공표용 여론조사를 발주하고, 조사 결과를 캠프와 공유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검찰이 ‘명태균 게이트’의 핵심 혐의를 선거법이 아닌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좁혀 들여다보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대납’ 성격의 금전거래가 투명하게 진행되기 어려운 만큼 공천 등 다른 형태로 보상을 원하는 정치브로커가 발생할 틈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비서관은 “명태균 게이트도 윤 대통령 측의 비공표용 여론조사에 대한 정산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시작된 케이스 아니냐”면서 “명씨가 일반적인 경우보다 통계적인 것도 좀 보고, 경력도 많았던 특이한 케이스이기는 하지만 지금 같은 구조에서는 명씨 같은 사례가 또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말했다.

여론조사기관에 등록 의무화 추진도
이 때문에 명태균 게이트가 촉발된 직후부터 여야 정치권에서도 비공표용 여론조사를 악용한 교란 행위를 막기 위한 법 개정 움직임이 활발하다.
박정훈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해 내놓은 소위 ‘명태균 방지법’(공직선거법 개정안)은 공직선거법이나 정치자금법을 위반한 여론조사기관을 영구 퇴출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등록 취소 사유를 기존 ‘선거 여론조사 관련 범죄’에서 공직선거법 또는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확대하고 부정 여론조사기관의 재등록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양부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내놓은 공직선거법 개정안의 경우 비공표·미보도 선거 여론조사에 대해서도 조사설계서와 표본추출, 결과분석 등 조사의 신뢰성과 객관성의 입증에 필요한 자료와 수집된 설문지 및 결과분석 자료 등을 관할 여심위에 신고하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행법의 사각지대를 악용한 미공표·미보도 여론조사 조작 의혹이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만큼 비공표용 여론조사에 대한 감시 수준을 공표용 여론조사 수준으로 끌어올리자는 취지다.
여심위도 이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는 있다. 여심위는 지난해 10월 열린 ‘선거 여론조사 환경변화와 심의제도 개선방안’에서 현재 일부 공표용 선거 여론조사에만 적용되던 신고 의무를 비공표 여론조사에도 확대 적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아예 비공표 여론조사기관을 선관위에 등록한 여론조사기관으로 한정하는 방안도 고려되고 있다. 조승환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여심위는 지난해 국정감사 질의 회신에서 “공표와 비공표용 조사 구분 없이 선거에 관한 여론조사를 실시하는 기관에 모두 등록 의무를 부여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올 3월 26일 기준 여심위에 등록된 여론조사기관은 모두 55개다. 여심위는 앞서 지난해 초 4·10 총선을 앞두고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판정된 부실 여론조사기관 30곳의 등록을 취소한 바 있다. 여심위는 지난해 7월 선거 여론조사기관 등록 요건을 분석 전문 인력 1명에서 최소 3명 이상, 상근직원 3명에서 5명 이상, 연간 매출액 5000만원에서 1억원 이상으로 각각 높였는데, 등록이 취소된 기관들의 경우 대부분 이 같은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
거꾸로 말하면 비공표용 여론조사를 실시할 수 있는 기관의 자격을 선관위 등록 여론조사기관으로 강화할 경우 어느 정도 전문성이 검증된 기관들로 조사가 진행된다고 기대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이달 초 비공표용 여론조사에 대한 신고·감독 강화 개정안을 발의한 양부남 의원실은 “비공표용 여론조사를 이대로 둬선 안 된다는 법안이 국회에 다수 발의돼 있고, 공감대가 형성돼 이견도 거의 없는 상태”라며 “이번에 조속히 법 개정에 이르지 못하면 또 다른 명태균의 등장을 방치하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