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항공업계는 그야말로 대격변기를 맞고 있다. 지난달 28일 유럽연합집행위원회(EC)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기업결합을 승인하면서 양 항공사 통합의 최대 고비를 넘겼다.
아직 미국이 남았지만, 돌발변수만 없다면 큰 어려움은 없을 거란 전망이다. 통합이 계획대로 진행되면 매출 21조원, 항공기 220여대의 세계 10위권 ‘메가 캐리어’(초대형 항공사)가 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1988년 아시아나항공의 출범으로 시작된 국내 항공시장의 경쟁구도가 마감되고, 또다시 대한항공의 독주체제가 되풀이될 거란 우려도 나온다. 일부에선 벌써 항공료 인상 등 대형항공사(FSC, Full Service Carrier) 독점의 부작용을 걱정하는 소리가 들린다.
게다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계열의 저비용항공사(LCC, Low Cost Carrier)인 진에어·에어부산·에어서울을 합쳐 통합 LCC를 출범시킬 거란 소식도 있다. 세 항공사를 합하면 현재 국내 LCC 중 1위인 제주항공보다 매출과 비행기 보유 대수 등에서 훨씬 앞서게 된다.
이렇게 되면 대형항공 시장은 통합대한항공이, 저비용항공 시장은 통합LCC가 압도적으로 주도하는 상황이 돼 다른 국내 항공사들은 이들과의 경쟁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국내 상황만 복잡한 게 아니란 점이다. 우리 항공업계를 둘러싼 대외 환경도 녹록지 않다.
인천공항공사와 한국공항공사 등 양대 공항공사에 주요 항공사들이 회원인 한국항공협회의 조모란 총괄본부장은 최근 국회에서 열린 ‘항공운송 경쟁력 강화방안 모색을 위한 정책 토론회(이하 토론회)’의 주제발표에서 지정학적 리스크를 우선 꼽았다.
우크라이나전쟁과 중동분쟁의 여파로 유럽 등 장거리노선을 최대 2~3시간씩 우회 비행하면서 항공사의 유류비 부담이 15%가량 상승했다는 것이다.
또 고환율, 고금리 등 외부변동성이 커지면서 항공사 운영에도 부담이 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등 중동지역 항공사의 공격적인 저가공세도 우려 사항이다. 조 본부장은 “중동항공사들은 대부분 국영이어서 유류세 등이 없다 보니 가격 경쟁력에서 우리 항공사들보다 훨씬 유리해 시장잠식 속도가 빠르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만만치 않은 국내외 항공시장 여건에서 우리 항공업계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필요로하는 건 뭘까. 마침 이날 토론회에선 공항과 항공사 측면에서 많은 제언과 요구사항들이 쏟아졌다.
박진서 한국교통연구원 항공우주교통본부장은 ▶항공운송산업구조변화에 따른 시장환경 모니터링 체계 수립 ▶공항의 효율적인 개발 및 운영을 위한 대응 방안 마련 등을 제안했다.
공항업계에선 ‘신속출국서비스(패스트트랙, Fast Track)’ 도입과 ‘공항시설사용료’의 적정화 등을 바라고 있다. 인천공항공사의 김홍수 운영본부장 직무대행은 “외국의 27개 주요 공항에선 패스트트랙을 시행하고 있다”며 “승객 편의와 공항 경쟁력 강화를 위해 신속한 출국서비스 도입이 필요하다는 게 공항뿐 아니라 대부분 항공사의 요구”라고 말했다.
김포공항 등 인천공항을 제외한 모든 국내공항을 운영하는 한국공항공사의 허주희 글로컬사업본부장은 “항공여객이 내는 공항시설사용료는 공항시설 개선과 확장 등 서비스강화에 사용된다”며 “김포공항 등은 2003년 이후 17년간 사용료가 동결된 탓에 투자재원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대형항공사는 정부차원의 세제 지원과 차별 없는 정책 시행을 요구한다. 대한항공의 이신 정책지원실장은 “항공사 입장에서 가장 큰 투자가 항공기 구매인데 다른 사업에는 적용해주는 1%의 세액공제를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아시아나항공의 태기팔 대외협력담당 상무도 “대형항공사의 정비시설에도 관세·취득세·부가세 등의 면제 혜택을 공정하게 적용해달라”고 요구했다.
LCC도 할 말이 적지 않았다. 송경훈 제주항공 경영지원본부장은 “지방공항 취항과 운항 중단이 조금 더 자유로워졌으면 한다”며 “한번 취항하면 어떤 이유로든 운항 중단이 너무 어렵고, 여러 경로로 압박도 심하다”고 토로했다.
티웨이항공의 박성섭 화물대외담당 상무는 “인천공항의 슬롯(Slot, 특정 날짜와 시간대에 이착륙할 수 있는 권리 및 허가)이 너무 부족해 LCC가 이를 확보하기 너무 어렵다”고 호소했다.
이날 토론회에선 항공협회가 각 항공사로부터 받은 현장체감형 규제개선 요구안도 소개됐다. 이 중 먼저 눈에 띄는 게 “기내 심폐소생술 중단 관련 기준을 마련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현재 객실승무원은 기내에 환자가 발생하면 ▶기장에게 즉시 보고 ▶기내 승객 중 의료진 호출▶응급처치의 과정을 따른다. 그런데 응급처치 중 심폐소생술 중단에 대한 기준이 없는 탓에 승무원의 육체적 정신적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항공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9월엔 기내 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을 하고, 자동심장충격기까지 사용했지만 별 반응이 없었는데도 중단 관련 기준이 없어 인천공항 도착 때까지 8시간가량 객실승무원들이 교대로 심폐소생술을 한 사례도 있었다. 이 때문에 응급처치 이후 예후를 판단해 지상의 응급의료 담당 의사를 통해 심폐소생술을 멈추는 등의 기준을 정해달라는 얘기다.
또 기종별로 각각 조종 자격증명을 따야 하는 현행 제도를 바꿔 유사한 기종은 통합적으로 자격을 인정해달라는 요구도 있다. 미국과 유럽 등에선 항공기간 유사성에 근거해 복수 기종 운항 및 자격유지를 시행하고 있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 유사시 항공기 조종인력 확보에 유연성이 생긴다는 게 항공업계 설명이다. 정부 입장에서 항공업계의 모든 요구를 수용하기는 어렵겠지만, 국제적 경쟁력 확보와 운영상 애로사항 해소 측면에서 보다 적극적인 검토가 필요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