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류가 가장 먼저 본격 재배를 시작한 작물은 무엇일까요? 야생의 수많은 먹을거리를 농사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겠습니까. 허다한 실험을 통해 의미 있는 생산성과 경제성을 확인한 다음에야 특정 작물을 주 식량작물로 선택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선택받은 식물을 창시 작물(founder crops)이라고 부르는데, 대표적인 것이 밀과 보리입니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창시 작물은 여덟 가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물들은 모두 현재의 시리아 남부, 요르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터키, 그리고 이란의 자그로스에서 약 1만1000년에서 1만 년 전, 토기 이전 신석기 시대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곡물(아인콘 밀, 에머 밀, 보리), 콩과 식물(렌틸콩, 완두콩, 병아리콩, 비터 베치), 그리고 섬유(기름) 작물(아마 또는 아마씨) 등이 8가지의 창시 작물로 불리고 있습니다.
먼 옛날의 밀과 보리가 지금과 똑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농민에 의해 선발되거나 숱하게 육종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밀과 보리의 면모를 갖추었겠습니다. 아시다시피 같은 밀이나 보리이면서도 품종은 무척 다양합니다. 보리의 경우 토종이 우리나라에서만 340종 수집되었다고 하니까 말 그대로 유전적 다양성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 많은 종류의 토종 종자는 수집, 보존(?)되고 있을 뿐 우리들의 식단에는 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씨앗이 종자산업체의 손에 넘어가 극단적인 품질 개량이 이루어져 이른바 F1종자가 종자 잇기의 대세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토종보다 품질과 수량에서 우위를 보이는 F1종자를 육종의 승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불임, 씨앗 아닌 씨앗의 시대
F1종자의 가장 큰 특징은 씨앗 본연의 기능인 번식 기능이 극도로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부부가 시험 삼아 고추 F1종자에서 채종하여 이듬해에 심은 적이 있는데, 잘 자라는가 싶었으나 결실의 크기와 모양, 숫자가 형편없었습니다.
F1종자는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먼저 우수한 형질(예: 높은 수확량, 특정 질병 저항성)을 가진 품종을 여러 세대 동안 자가 수분시켜 유전적으로 균일한 순종(순계 품종)을 만듭니다. 이 과정에서 태어난 종자는 자가 수분을 반복하면서 유전적 다양성이 감소하여 생존력, 번식력, 성장 속도, 전반적인 활력 등이 저하되는 현상을 보입니다. (근친약세) 그 다음으로는 여러 순계품종 중에서 가장 좋은 특성을 조합할 수 있는 두 개의 부모 품종을 선택하여 두 부모 식물의 꽃가루를 다른 쪽 식물의 암술머리에 수동으로 옮겨주어 씨앗이 맺도록 합니다. (교차 수분) 이렇게 태어나는 종자가 F1종자입니다.
근친약세를 보이는 부모 품종으로 교차 수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재배 물량이 적거나(개체군 크기 감소) 재배지가 고립되고 수분 매개체가 부족해지는 등의 환경적 스트레스 요인이 발생하면 문제가 나타납니다. 자가 수분이나 근연 관계 개체 간의 교배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잠복해 있던 근친 약세가 급격히 심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F2(다음 세대) 그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은 지독합니다. 작물의 성장 속도가 느려지고, 크기가 작아집니다. 종자 생산량이나 꽃가루 생산량이 감소하여 종자의 품질이 떨어집니다. 특정 질병이나 해충에 대한 저항성이 약화되어 재배 작물 전체가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숨겨져 있던 열성 유전자가 동형 접합 상태(특정 유전자에 대해 유전 정보가 동일하게 갖춰진 상태로, 유전적으로 안정적이지만 숨겨진 열성 형질이나 유전병이 발현될 가능성을 내포)로 발현되어 기형이나 생존율 저하를 유발합니다.

토종의 정의
씨앗으로 다음 세대를 이어가는 식물은 고정종자라고 부릅니다. 재래종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토종(Native/ Heirloom)은 특정 지역에서 오랜 기간 정착하여 풍토성을 띤 종자를 높여(?) 부르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토종의 가장 직관적인 기준은 ‘얼마나 오랫동안 이 땅에서 자랐는가.'입니다. 이는 세대 개념입니다. 농업 유전자원 분야에서는 보통 외래에서 도입되었다 해도 특정 작물이 최소 30년에서 50년 이상(또는 3세대 이상) 해당 지역에서 반복 재배되어 그 지역의 기후와 풍토에 적응했다면 토종이라고 합니다. (세대 계승성) 사람의 개입 없이 원래부터 특정 지역 자연 생태계에 존재하던 식물을 자생종이라고 하고, 먼 과거에 들어와서 완전히 특정 지역의 작물이 된 것을 재래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들어왔지만, 특정 지역 농민에 의해 오랫동안 자가 채종 되며 그 지역 환경에 고정된 것은 귀화종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자생종과 재래종, 귀화종을 모두 토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토종의 판별 기준은 지속 가능한 재생산 능력입니다. 씨앗을 받아 다음 해에 심었을 때, 부모 세대와 똑같은 형질의 작물이 나와야 합니다. 같은 품종이라도 키가 조금씩 다르거나 열매 색이 미묘하게 다른 유전적 폭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DNA 분석을 통해 기존 상업용 품종이나 외국 품종과 유전적으로 뚜렷하게 구분되는 유전적 고유성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대개 토종의 이름에는 수집된 지역명이 붙습니다. 특정 지역의 토양 미생물, 강수량, 일조량에 적응하여 다른 지역으로 가면 그 맛이나 형태가 변하기도 하는, 장소 특정성이 토종에는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토종에는 비료나 농약을 많이 주지 않아도, 그 지역의 척박한 환경이나 병해충을 견디는 야생적 형질이 남아있습니다.
농생태학에서는 토종에 대해 농민의 기억을 중요시합니다. 토종 수집 과정에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 “시어머니가 물려 주셔서…”, “시집올 때, 친정어머니가 한 줌 쥐어 준…”이라는 말입니다. 유래, 또는 내력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토종은 사람이 지켜온 것입니다. 단순히 씨앗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씨앗을 심는 시기, 먹는 방법, 갈무리하는 방식 등이 전통 지식, 또는 문화와 함께 전승되고 있는 것입니다.

토종이 없으면 F1도 없다
역설적이지만, 토종이 풍부하지 않으면 질 좋은 F1종자를 생산해낼 수 없습니다. 종자를 유전자원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전통 종자는 지역의 기후와 토양에 적응하며 오랜 시간 농민들의 손에 의해 선발되고 보존되어 온 살아있는 유산입니다.
종자 은행에 얼려둔 씨앗은 안전하지만, 멈춰 있습니다. 이를 현지 외 보전(Ex-situ conservation)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토종의 유지와 확산은 현지 내 보전(In-situ conservation)으로 가능합니다. 기후는 매년 변하고 병해충도 끊임없이 적응, 진화합니다. 토종이 들판에 심어져 계속 확산되어야만, 현재의 변화하는 환경과 싸우며 내성을 획득하여 주변 생태계와 함께 진화 과정을 이어 나갈 수 있습니다. 50년 뒤 냉동고에서 꺼낸 씨앗은 50년 전의 환경에만 적응된 구형 소프트웨어라서 미래 환경에서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널리 확산되어 여러 농민이 다양한 땅에 심어야 같은 씨앗이라도 각기 다른 돌연변이와 형질 발현을 일으킵니다. 이야말로 인류가 미래의 위기에 꺼내 쓸 수 있는 유전적 카드의 숫자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는, 진정한 수확의 여정입니다.
농생태학적으로는 소수 품종의 대량 재배는 전염병 하나에 국가 식량 망이 흔들리는 취약한 구조입니다. 다양한 토종이 전국 곳곳에 확산되어 있으면, 특정 질병이 돌더라도 전멸을 막는 방화벽 역할을 합니다. 토종은 화학 비료나 농약 의존도가 낮습니다. 경제적 자립 기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토종 작물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 작물과 연결된 생태계가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농업생태계에서의 생태계서비스 복원의 열쇠가 토종인 것입니다.
이근우 시민,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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