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이 아픈 것은 그 대상과 이별하기 싫기 때문이다. 곁에 두고 자주 보고, 언제든지 보고 싶은데 그런 상황이 되지 않기 때문에 슬픈 거다.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는 슬픈 상태가 이별이다. 보고 싶은 것은 보고 있으면 좋은 기분이 생기기 때문에 보고 싶은 거다. 보기만 해도 싫다면 굳이 보고 싶겠는가. 보는 것이 고통이라면 보지 않길 원할 것이다. 그러므로 보면 좋고, 즐겁고, 기쁘고, 친근한 감정이 생기는 대상이기 때문에 보고 싶어진다.
홍희가 맞이한 슬픈 이별 중 하나가 산비들기와 이별이다.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산비둘기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산비둘기가 들어갔다고 말을 해도 그날 저녁 소죽을 끓였다. 즉 소죽을 끓이기 위해 불을 땠다. 불은 가마솥을 끓게 하고 구들장을 데워 방을 따뜻하게 했다. 산비둘기가 들어간 검은 구멍으로 불길을 날랐다. 소가 여물을 먹어서 살아야 하고, 사람은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자야했다. 불을 때는 것은 필요한 행위였다. 막을 수도 없었고, 막는다고 불을 때지 않을 상황도, 아버지도 아니였다.
불길에 아마도 산비둘기는 익어서 죽었을 것이다. 나중에는 새까만 재로 남았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만 해도 끔찍했고,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산비둘기가 그렇게 된 것이 홍희때문인 것 같았다. 자신이 키우고 싶다고 하여 아버지가 날개를 자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묶어두었던 실을 풀지만 않았어도 아궁이로 들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서 아궁이를 막아두었다면 등등 후회와 자책을 했다. 아무리 후회와 자책을 해도 과거로 돌아갈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보니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대비를 했더라면 겪지 않았을 것이기에 자꾸만 후회와 자책을 했다.
그것이 시작이였을까. 무슨 일을 할 때 실수할까봐 걱정하고, 실수하지 않도록 수없이 머릿속으로 리허설을 반복한다. 변수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체크하고, 돌발상황이 발생해도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도록 자꾸만 되새김질을 한다. 그래서 큰 일을 하지 못한다. 스트레스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 일이 끝나고 나면 별일 아니었는데 너무 긴장했다고 스스로를 또 자책한다. 잘 달래고 다음에는 그러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지만 머릿속에서 리허설은 반복된다.
시작된 또 하나는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것이었다. 잠을 자려고 아랫방에 누우면 구들장 밑에 새카맣게 탄 산비둘기의 시체가 있을 것만 같았다. 자신이 누운 바로 아래에 있는 산비둘기는 자신을 얼마나 원망했을까. 자신을 죽어서 숯검덩이 되었는데 편하게 잠을 자는 것을 얼마나 매서운 눈초리로 볼 것인가. 그건 또 할머니의 매서운 눈초리를 생각나게 했다. 귀신이야기가 많았던 어린시절, 귀신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있을지로 모른다는 믿음이 나쁜짓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다. 나쁜 짓을 해서 벌을 받을까봐 두려웠다.
산비둘기와 원하지 않는 이별로 슬픈 감정이 생겼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책감과 벌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겼다. 이별의 슬픔을 느끼고 싶지 않도록 나쁜일로 엮이지 않도록 사람과 관계를 적극적으로 만들지 않고, 친한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에서 만나기 시작했다. 어린 홍희는 관계에 대한 방어기제가 생겼다. 그것이 홍희를 외롭게 했다.
산비둘기와 만남은 기뻤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즐겁고 행복했으나 원하지 않은 이별과 죽음으로 마음이 아렸다. 더 이상 어떻게 해 볼수도 없고, 되돌릴수 없는 죽음앞에서의 이별이 너무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