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32년, 입시 지옥의 대물림

2025-11-11

내일은 고3 딸의 수능일이다. 고사장 입실 완료 시간인 내일 오전 8시 10분, 딸은 다른 수험생 55만 명과 함께 긴장 가득한 얼굴로 시험 유의사항에 귀 기울이고 있을 거다. 기자도 여느 부모처럼 ‘자식보다 더 떨리는 맘으로’ 선전을 기원하고 있을 테고. 물론 수험생·부모만의 일이 아니다. 내일은 나라가 멈춰서는 날이다. 오전엔 기업 출근 시간, 증권시장 개장이 늦춰지고, 오후 영어 듣기평가에 맞춰 항공기 이착륙이 중단된다. 1993년 첫 시행 이후 반복된 수능일 풍경이다.

93년 도입 후 ‘개선’ 시도 20여 회

대부분 부작용 더 큰 ‘개악’ 그쳐

과잉경쟁 완화 ‘큰 그림’ 찾을 때

매년 변함없는 겉모습과 달리 수능은 지금까지 20여 회, 적어도 2년에 한 번 꼴로 크고 작은 변화를 겪었다. 그래서 32년 전 시행 첫해 아빠가 치른 수능과 내일 딸의 수능은 여러모로 차이 난다. 시험 횟수부터 다른데, 기자가 응시한 93년 수능은 8월·11월 2회 시행됐다. “단 한 번의 시험으로 인생을 가르는 건 가혹하다”는 의견에 따라 두 번 치러 더 나은 점수를 대입에 반영했다. 취지야 그럴 듯했으나, 막상 시행해보니 문제가 생겼다. 난이도 조정 실패로 11월 평균 성적이 8월보다 4~6점 낮았던 거다. 석 달 공부가 헛고생된 대다수 수험생의 원성이 빗발쳤다.

이렇듯 수능의 32년 변천사엔 그럴법한 취지·아이디어로 시도한 ‘개선’이 결국 혼란·부담을 가중한 ‘개악’으로 판명된 경험이 숱하다. 딸의 수능도 그렇다. 올해 대입 혼란의 주범인 ‘사탐런’ 얘기다. 2022 대입부터 학생의 지망 계열에 상관없이 수능 탐구과목을 자유롭게 선택하게 했다.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의 취지를 살리자는 거였다. 그런데 더 나은 점수·등급을 위해 학교에선 과학을 배우고도 수능은 사탐을 보는 자연계 수험생이 급증했다. 결국 학교에서 배운 과목으로 수능을 보면 손해인 상황이 됐다. 2014~16 대입의 ‘수준별 수능’도 그랬다. 난이도가 다른 두 유형을 출제하고 대학·응시자가 하나를 고르면 수험생, 특히 중위권의 부담이 줄 것이란 발상이었으나, 효과는 없고 혼란만 커 폐지됐다.

일부 효과는 있어도 금세 닥친 부작용·역효과로 개편 취지가 퇴색한 사례도 많다. 영어 절대평가 전환은 고교 단계 영어 부담이 일부 줄긴 했으나, 영어 대신 대입 영향력이 커진 수학·국어에 학업 부담, 사교육 수요가 몰리면서 전반적인 개선 효과는 얻을 수 없었다. 게다가 “영어를 미리 끝내고 수학·국어에 집중해야 한다”는 ‘대입 공식’이 퍼져 4세·7세 고시로 불리는 무분별한 영어 조기교육 열풍을 부채질한 셈이 됐다.

수능·입시 개편엔 이렇게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법칙’이 작동한다. 제도 변화로 의도했던 효과보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 예상 못한 부작용이 컸다는 얘기다. 일차적 원인은 물론 탁상행정이다. 매번 정치권·여론의 압력에 쫓겨 치밀한 검토 없이 급히 추진하다 사달이 났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수험생과 학부모를 입시 지옥에 내몰고 있는 구조적 문제는 덮어둔 채 ‘시험 손보기’에만 매달렸다는 점이다. 줄어드는 청년 일자리, 여전한 학벌·학력 중심 채용 문화, 좁혀지지 않는 대기업·중소기업의 임금 격차 등의 얘기다. 2000년대 초중고 학생 수(2007년 827만 명→2024년 568만 명)는 급감했지만, 사교육비 총액(20조원→29조원)은 급증했다. 경쟁자 수가 줄어도 대입 경쟁·부담은 가중되는 기현상을 입시제도의 난맥상만으로 설명하긴 어렵다. 자녀에게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주려면 입시 경쟁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부모의 절박함이 한층 심해졌다는 게 보다 올바른 해석일 듯하다.

이런 면에서 두 달 전 취임 100일 기자회견 때 대통령의 발언은 실망스러웠다. 입시에 대한 물음에 대통령은 “어떻게 개편하느냐는 큰 비중 없다. 경쟁 과잉이 근본 문제”라고 답했다. 기자는 이어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겠다’는 메시지, 또는 대통령이 생각한 개혁의 ‘큰 그림’이 나올 걸로 기대했다. 하지만 본인은 전문가가 아니니 “국가교육위원회가 정상화되면 거기서 논의하기 바란다”는 말로 답변이 끝났다. 글쎄, 출범 후 3년이 지나도록 ‘유명무실’, ‘전문성 부족’이란 비판을 받는 국교위가 대통령이 말한 ‘근본적 해결책’을 제때 내놓을 수 있을까.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건 미친 짓’이란 격언이 떠오른다. 32년 동안 되풀이했던 식이라면 수능, 입시를 수십 번 더 고쳐도 국민의 부담·혼란을 줄이는 데엔 별 도움 못 될 거란 얘기다. 세대를 넘어 반복되는 수능일 풍경처럼, 아빠가 겪은 입시 지옥이 딸에게 대물림되고 있다. 이 굴레를 끊어내는 일, 그게 자녀의 수능을 맞은 한국의 부모가 품는 또 하나의 소원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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