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 칼럼] 수백억 설비 투입되는데…간장·고추장 ‘단순 가공식품’ 취급은 억울

2025-11-02

물가를 안정시키려는 행정의 선의가 때론 산업의 숨통을 조이기도 한다.

지난 2022년 7월, 정부는 ‘긴급 민생안정 10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단순 가공식품 부가가치세 한시 면세 제도를 시행했다. 그러나 제도 설계 과정에서 산업별 구조 차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탓에 간장·된장·고추장 등 장류 산업이 의도치 않은 불이익을 겪고 있다. 정책 목표는 옳았지만, 일률적 행정이 현장의 현실과 다소 어긋난 셈이다.

부가가치세법 시행규칙 제24조는 ‘데친 채소류, 김치, 단무지, 장아찌, 젓갈류, 게장, 두부, 메주, 간장, 된장, 고추장 등 단순 가공식품’이 면세 대상으로 명시돼 있다. 하지만 장류는 콩을 원료로 장시간 발효·숙성하는 제조공정을 거치는 제품으로 발효조와 숙성 탱크, 자동화 포장라인 등 수백억원대 설비가 투입되는 자본집약적 ‘장치산업’이다. 단순 절임이나 혼합 공정으로 완성되는 가공식품과는 구조적 차이가 크다.

단순 가공식품에 장류가 포함되면서 장류 제조기업들은 매입세액을 환급받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를 안게 됐다. 제품 판매 시 부가세를 부과할 수 없고, 설비·포장재·원부자재 구매 시 납부한 부가세는 공제되지 않는다. 결국 납부한 세금이 고스란히 비용으로 남아 제조원가를 끌어올리고, 이는 곧 수익률 하락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설비 투자나 신제품 개발 여력이 줄어드는 등 산업 전반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 정상적으로 매입세액을 환급받고 있는 타 식품 업종과의 형평성에도 맞지 않는다.

장류 업계는 제도의 불합리함을 인식하면서도 정부의 물가 안정 취지에 공감하며 협조해왔다. 그러나 한시적인 조치일 거라는 기대와 달리 이 제도는 한 차례 연장을 거쳐 2025년 말까지 이어지고 있다. 시행규칙 일몰을 기다리던 기업들은 부담이 장기화하면서, 일부는 신규 공장 건립이나 설비 투자를 중단한 상태다.

최근 세계적으로 K-푸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한국의 전통 장류 역시 ‘K-소스’로 불리며 새로운 성장 기회를 맞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는 장류 산업이 세제 구조로 인해 발목이 잡힌다면 K-소스 산업의 도약 기회를 잃게 될 수 있다.

물가 안정이라는 정책 취지는 분명하다. 그러나 선의로 시작된 제도가 산업 현실을 외면할 때, 결과는 왜곡될 수 있다. 장류를 단순 가공식품 목록에서 제외하고 정상 과세 체계로 환원하는 일은 단순히 업계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산업 구조에 부합하는 세제 보완이다. 정책의 섬세함이야말로 민생과 산업 모두를 지키는 길이다.

정광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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