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구원들이 주당 52시간을 넘겨 일해야 경쟁력이 생긴다면, 그런 회사는 경쟁할 자격조차 없다.’
주 52시간 근로제한 규정 완화를 둘러싼 논란을 배경으로 한 이 말은 일면 매우 옳다. 하지만 필요한 경우, 소수 핵심 연구원들이 시간제한 없이 일하지 않아도 국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심각한 의문이 든다.
우리 반도체산업은 고액 연봉자가 근로시간 규제를 받지 않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white collar exemption)’이 있는 미국, 그리고 주당 근무시간 제한이 없는 여러 나라 기업들과 경쟁한다. ‘꼭 필요한 연구시간을 제한한다면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 대처하려면 기존 입장을 내려놓고 국익을 위해 초당적·초이념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반도체산업이 인공지능(AI)과 결합하여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고 있는 지금은 산업 주도권의 유지와 상실이 결판나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그래서 경쟁국들은 수십조원에서 수백조원을 민간 기업들에 투입하고 있다. 즉, 국가 간 전쟁의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의미이다. 세계를 뒤덮은 반도체전쟁의 포화 속에서 근무시간 제한을 ‘한가롭게’ 논의하는 우리 모습을 보고 경쟁국들은 비웃을지 모른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등가교환의 법칙’을 되새겨보자. 우리나라를 먹여 살리는 반도체산업을 지켜내기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는 ‘우리 중 극히 일부라도 52시간 한도를 넘어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애초에 고액 연봉을 받는 핵심 연구 인력은 추가 수당 때문에 억지로 연장 근무를 하지 않는다. 회사가 필요 없는 노동을 시킨다면 이들은 다른 기업으로 이직할 수도 있다. 승진, 파격적인 인센티브, 기술적 만족감을 위해 본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초과근무를 선택하는 이들에게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을 적용해야 한다. 시간외수당을 줘서 더 일을 시켜야 하는 종류의 일이라면 당연히 경영시스템을 개선해서 근로시간 총량제를 지키도록 노력하면 될 일이다.
치열한 반도체전쟁의 최전선에서 우리나라의 미래를 밝혀줄 소수의 핵심인력이 필요한 만큼 일하고, 그 결과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받도록 해줘야 한다. 근무시간 제한제도를 완화하기 위해 고용인들이 등가교환으로 내놓아야 할 것은 초과근무수당이 아니라 파격적인 성과급, 스톡옵션, 조기승진과 같은 시스템의 개선이다. 경영자들이 진정성 있는 등가교환물을 내놓고, 정직하게 논의를 해야 이 논의는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이병훈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주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