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기술이 ‘더 작게, 더 좁게’의 한계에 부딪혀 업계가 고심할 때, 실력파 소재·부품·장비 기업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그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연구개발(R&D)한 신제품을 삼성·TSMC·인텔 등에 팔 기회라서다.
창업 358년, 한국 진출 37년차 반도체 소재 기업 머크는 최근 한국 연구개발(R&D) 투자를 늘리고 있다. 지난달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만난 김우규 한국 머크 대표는 “한국 R&D 투자에 미온적이던 글로벌 소부장 기업의 기조가 확 바뀌었다”라며 “한국 반도체 생태계에 절호의 기회라, 국가적 전략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글로벌 소부장 기업, 韓 R&D 기조 바꿨다
머크는 지난 2021년 한국에 6억 유로(약 8800억) 투자 계획을 발표 후 2023년 한국 소재기업 엠케미칼 인수, 지난해 R&D센터 개소 등 투자 행보를 이어왔다. 올해는 충북 음성에 차세대 소재 몰리브덴 생산 시설, 경기 평택에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R&D 증설을 추진 중이다.
김 대표는 “인공지능(AI)용 칩은 저전력·저발열·고대역을 다 충족해야 하기에 설계뿐 아니라 소재의 혁신이 요구된다”라며 “대형 고객사(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소부장의 밀착이 중요한 시기”라고 했다.
반도체 업계는 초정밀·초고가 시설을 다루기에 ‘하던 대로 하자’는 보수적 분위기가 강하지만 한계를 만나면 신기술을 본격 도입하는데, 15~20년 만에 한 번씩 오는 이 기회를 잡은 소부장이 다음 ‘슈퍼 을(乙)’에 오른다는 것. ASML·램리서치·KLA·JSR·듀폰 등도 최근 2년 새 한국 투자를 늘렸다.

머크는 한국에 12개 R&D 센터를 운영 중이며, 반도체·디스플레이 제품 201종 중 181종을 국내 생산한다. 김 대표는 “(삼성, SK 등) 고객사들이 패터닝 웨이퍼를 들고 와 저희 연구원들과 바로 분석해본다”라고 했다. 또 “새 소재와 공정에 열려 있느냐가 반도체 기업의 성패를 가른다”라며 “그간 인텔은 보수성이 강했고 TSMC는 공정 혁신에 훨씬 적극적이었다”라고 말했다.
주목할 미래 기술로는 ‘디스플레이와 반도체의 결합’을 꼽았다. 김 대표는 “반도체 미세화·집적화가 한계에 왔기에 전자가 아닌 광자(photon)를 이용한 칩이 R&D를 거쳐 시장에 나올 것”이라며 “증강현실(AR) 시장에도 기회가 많아, 한국의 디스플레이 기술은 더 중요해진다”라고 했다. 메타가 개발 중인 증강현실(AR) 안경에도 머크의 광학 기술이 사용된다고 덧붙였다.
한국 환경 규제, EU보다 수준 낮아도 복잡
김 대표는 1997년부터 독일 머크 본사에서 반도체 소재를 담당하다가 지난 2020년 한국 머크의 ‘첫 한국인 대표’로 부임했다. 그는 “이 작은 나라에 세계적 반도체 기업이 두 개나 있는 게 어마어마한 이점인 걸 한국만 모른다”라며 “더도 말고 남들만큼의 국가 지원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대표적으로 ‘규제 창구 일원화’를 꼽았다. 머크는 유해 논란이 있는 과불화화합물(PFAS) 없는 소재를 개발하는 등 글로벌 환경 논의를 선도하는 기업이지만, 중앙부처와 지방자치단체를 일일이 찾아다녀야 하는 한국의 환경규제 대응은 쉽지 않다고 했다. 그는 “환경을 보호하는 것과 규제를 합리적으로 운영하는 건 별개”라며 “규제를 총괄하는 원스톱 창구가 절실하다”라고 말했다.
머크는 2014년 유럽의 AZ일렉트로닉스(절연막, 패터닝), 2019년 미국 버슘(특수가스, 평탄화, 식각), 2023년 한국 엠케미칼(전구체), 2024년 프랑스 유니티SC(광학 및 계측) 인수로 반도체 사업의 구색을 공정별로 갖춰 왔다. 김 대표는 “머크는 8대 공정의 핵심 소재를 전부 다루고 있다”라며 “포트폴리오 강화는 계속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