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신중지는 범죄로 다뤄져선 안 됩니다. 이것은 의료서비스입니다.”
온라인으로 임신중지약 정보 등을 제공하는 국제단체 ‘위민온웹(Women on web)’의 의사 수잔 펠트하이스 박사가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말했다. 여성인권을 상징하는 초록색 옷을 입은 그는 “임신중지약은 여성의 안전을 위한 필수적 권리”라고 했다.
이날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에서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등이 주최한 ‘모든 사람들의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 보장을 위한 유산유도제 도입 간담회’가 열렸다. 유산유도제는 임신중지를 위해 먹는 약으로, 한국에선 ‘미프진’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지난달 13일 이재명 정부가 ‘임신중지 약물 도입’과 ‘임신중지 법·제도 추진’을 국정과제로 명시하면서 관련 입법을 통해 이 약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019년 형법상 낙태죄 조항이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은 이후로 여성단체 등은 미프진을 정식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관련 법이 정비되지 않았다”며 허가를 미뤄왔다. 국회에서도 입법이 되지 않으면서 6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프진 도입 등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국가 차원의 의료 정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SNS에선 ‘미프진 구합니다’와 같은 게시글이 꾸준히 올라오는 등 암암리에 거래되고 있다.

이날 간담회에 초청된 펠트하이스 박사는 임신중지약 도입을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한 해 7333만 건의 임신중지가 이뤄지고 있고 이 중 2500만건의 임신중지가 안전하지 않은 방법”이라며 “임신중지약은 여성이 불법 수술 등에 의존하지 않고 안전하게 임신중지에 접근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간담회 자료를 보면 임신중지약을 먹었을 때 과다 출혈 등 심각한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은 0.5% 이하라고 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05년 미프진과 같은 임신중지약을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했다. 현재 미국·프랑스 등 90여개국에서 임신중지약을 약국 등에서 구매할 수 있다. 한국에선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가 보건복지부 장관과 식약처장에게 도입을 권고했다.

펠트하이스 박사는 임신중지를 범죄화하는 사회에선 불평등이 심화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임신중지가 필요한 사람들은 주로 사회적 취약계층”이라며 “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 청소년, 실업자 등 임신중지에 대한 정보나 교육·비용이 부족해 치료에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제도가 없으면 이들은 안전하지 않은 임신중지로 내몰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임신중지를 범죄로 바라봐선 안 된다”고 했다.
간담회에 참여한 윤정원 국립중앙의료원 산부인과 전문의는 “이주 여성, 장애 여성 등 제도권 바깥에 있는 한국 여성들에게 임신중지 서비스는 사치제가 됐다”며 “의정 갈등으로 인한 전공의 사직으로 산부인과 진료도 부족한 상황에서 여성들 간에 어떤 격차가 생기는지 모니터링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정책연구원의 2025년 이슈페이퍼를 보면 임신중지 수술 비용 등은 ‘100만원 이상’이 40%로 해마다 느는 추세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1일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법안엔 ‘인공임신중절’을 ‘인공임신중지’라는 용어로 바꾸고, 수술에 더해 약물을 사용하는 행위도 임신중지 의료행위에 포함했다. 펠트하이스 박사는 “이런 필수적인 의료서비스는 굉장히 중요하다”며 “임신중지는 특권이 아닌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