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익의 인생 공간] 생각의 오두막

책으로 터질 듯한 가방을 들고 오두막으로 들어가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일주일 동안 이 작은 집에 틀어박혀 가져온 책들을 모두 읽을 예정이다. 남자의 이름은 빌 게이츠. 휴가의 이름은 ‘싱크 위크(Think week)’다. 그는 1년에 두 번 싱크 위크를 떠나 혼자만의 공간에서 책을 보며 생각에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생각 주간이라니, 얼마나 매력적인 말인가. 나도 해보고 싶어졌다.
#공간을 덜어내야 생각이 채워진다
자, 어디로 갈까? 빌 게이츠는 자신의 개인 섬에 지은 오두막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는 개인 섬이 아직 없는 관계로 대안을 찾아야 했다. 개인 섬 대신 우리 모두의 섬, 제주도를 택했다. 빌 게이츠 오두막의 실내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은 방에 창문 하나, 책상 하나. 그지없이 단출한 공간이었다. 그렇다. 내가 찾아야 할 공간은 ‘덜어낸 공간’이다. 생각해보라. 빌 게이츠 저택에 도서관이 없겠나 서재가 없겠나. 하지만 익숙한 공간을 채우고 있는 ‘유혹의 사물들(장서의 압박, 컴퓨터 화면, 냉장고의 맥주)’을 덜어내야 좋은 생각이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빌 게이츠는 어떤 생각이 필요해서 덜어냄의 오두막에 들어갔을까? 생각의 붓을 크게 휘두르려면 안락한 집을 떠나 생각의 오두막에 스스로를 가두고 긴 시간 자신과 대면해야 한다.
요즘 이런 큰 그림이 나에게도 필요하던 차였다. AI와 로봇이 등장해서 인간을 대신하는 시대,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삶의 방향은 잘 잡았는가? 평소에는 그러려니 하며 정면으로 부딪혀보지 않았던 생각을 이번 기회에 해보고 싶었다.
이쯤에서 본 칼럼에 대해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건축가이자 교육자인 나는 책과 강연을 통해 ‘내 삶을 바꿔놓은 인생 공간’을 소개해왔다. 바쁜 삶에서 위로를 주는 ‘느린 공간’, 생각의 여백을 만드는 ‘아날로그 공간’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애로 사항이 있었다. 이렇게 명작 인생 공간을 소개하는 것은 좋은데, 독자가 거기에 가볼 수 있는 기회는 제한적이라는 것. 당장 빌 게이츠의 오두막을 가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작전을 바꿨다. 명작 공간의 특징을 건축가의 관점에서 읽어내되, 그에 상응하는 일상의 공간을 내 주변에서 찾아내자는 것. 빌 게이츠를 부러워만 하지 말고 우리 주변에서 나만의 오두막을 찾아내서 싱크 위크를 실천해보자는 것이 이 칼럼의 취지다.

내가 경험한 최고의 ‘생각의 오두막’은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1951년 지은 까바농(Cabanon)이다. 그의 나이 65세,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은 나이에 남프랑스 바닷가에 4평짜리 오두막을 지었다. 매해 여름이면 사무실이 있는 파리를 떠나 침대 하나, 책상 하나가 겨우 놓인 이곳으로 왔다.
재미있는 점은 건축주들을 위해서는 하얗고 매끈한 집을 짓던 그가, 자신을 위해서는 소박한 통나무집을 지었다는 점이다. 건축주들을 위해서는 근사한 ‘건축적 산책로’를 실험하던 그가 자신의 휴식을 위해서는 인간적인 크기를 가진 가구 몇 개로 공간을 꾸몄다. 이 오두막에 있는 손바닥만 한 책상에서 인도의 도시 계획 같은 거대한 구상이 나왔으니, 작은 공간이 품어낸 큰 생각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이곳을 방문해보고 가장 의아했던 것은 주방이 없다는 점이다. 공간 안내를 해주시던 멋쟁이 프랑스 할머니에게 물어봤더니, 입구에 감춰진 작은 비밀 문을 가리켰다. 까바농 옆에는 ‘바다의 별(불가사리를 의미)’이라는 작은 식당이 있었고, 르 코르뷔지에는 식당과 오두막을 직접 연결하는 문을 만들었다. 식사 준비라는 부담을 과감히 덜어내고, 이웃에 기대어 살도록 설계한 것이다. 대신 식당 주인에게 벽화 그리는 법을 가르치고 공간을 스스로 꾸미도록 격려하면서 매해 여름 자신을 반겨주는 이웃을 만들었다. 즉, 까바농은 완벽히 고립된 고독의 오두막이 아니라, 덜어낸 공간 속에서 이웃에 기댄 집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기댐이야말로 풍요로운 시간을 가능하게 만든 장치였다. 명작 인생 오두막은 덜어냄과 기댐의 지혜를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제주 사계해변 근처에서 ‘오피스’라는 숙소를 예약했다. 무엇보다 간소한 침실과 책상을 갖추고 있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화려한 호텔이었다면 이런저런 구경거리에 마음을 빼앗겼겠지만 차분한 분위기의 이곳에서는 도착하자마자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특히
1층이 로비가 아니라 책을 읽을 수 있는 공유 사무실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최근 ‘워케이션(일과 휴가를 결합한 시간)’을 보내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이들이 주로 선택하는 곳이다.
#몰입과 전환의 왕복운동을 하라
이들이 만든 일하는 분위기에 ‘기대어’ 나도 책을 읽자. 책 한 보따리를 짊어지고 1층으로 내려가서 사람들 틈에 섞여 독서를 시작했다. 이번 싱크 위크를 위해 선택한 책은 우치다 다쓰루의 『무지의 즐거움』. 교수이자 무도가인 저자가 어른스러운 배움에 대해 이야기한 책이다. 곱씹어 볼 대목이 많아 한 문장 한 문장을 음미하며 읽어 내려갔다. 자, 드디어 나만의 싱크 위크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데 1시간이 넘어가자 슬슬 몸이 꼬이고 지겨워졌다. 혹시 빌 게이츠도 책 읽다 지겨우면 슬쩍 컴퓨터 켜서 카드놀이 같은 걸 했을까?
찰스 다윈의 위대한 발견은 연구실이 아니라 산책로에서 태어났다. 그는 켄트에 있는 다운 하우스(Down House)에 머물며 짧은 오솔길을 만들고 연구가 막힐 때마다 그 길을 걸었다. ‘생각의 길(Thinking path)’이라는 별칭이 붙은 이 길을 한 바퀴 돌 때마다 돌을 하나씩 쌓았다고 하는데 하루에 5번 이상 돌았다는 메모도 남아있다. 쉽게 계산해 하루 10시간을 일한다고 하면 대략 2시간마다 한 번씩 생각의 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긴 것이다. 그리 대단한 길도 아니다. 15분이면 한 바퀴 돌고 집에 돌아올 수 있는 짧은 오솔길에 불과하다. 2시간 몰입 후 15분의 기분 전환. 그는 『종의 기원』이란 책을 써서 생명 다양성에 대한 인류의 생각을 근본부터 바꿔놓았는데, 그의 위대한 발견은 몰입 공간과 전환 공간을 오가는 왕복 운동에서 나온 것이다.
#지와 체의 공간을 오갈 것
싱크 위크를 위한 공간의 세 번째 조건, 전환 공간이 있을 것. 어딘가 차를 타고 멀리 가서 머리를 식히고 오는 곳이면 안 된다. 몰입 공간의 코앞에 있어야 생각이 막힐 때마다 쉽게 드나들 수 있다.
이 기준으로 숙소에서 나만의 ‘생각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주차장 옆에 농구대가 있길래 학생 때 이후 처음으로 슛을 쏘았다. 한 10번쯤 했나,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독서를 이어가니 기분이 상쾌했다. 책 2시간 보고 슛 10번. 그리고 반복. 이곳에 머무는 동안 농구대가 나의 생각의 길, 아니 ‘생각의 골대’ 역할을 해주었다. 한 가지 알게 된 것은, 머리를 쓸 때 몸을 움직이는 일의 중요성이다. 우치다 다쓰루도 자신의 합기도장을 열고 수련과 글쓰기를 함께한다고 한다. 수험생도, 대학생도, 회사원도 마찬가지다. 생각의 시야를 넓히기 위해서는 지(知)와 체(體)의 공간을 오가야 한다.
이번 싱크 위크에서 내가 얻은 깨달음은, 싱크 위크란 결국 생각의 방향을 조정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평소 우리의 생각은 눈앞에 닥친 일을 처리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그런데 이제 그 전진을 가속화시켜줄 내 몸 밖의 뇌, AI까지 생겨났다. 나보다 효율적인 외부의 뇌가 생각의 노를 빠르게 저어줄 테니, 내 머릿속 뇌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생각의 키를 움직여 항로를 정하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를 읽고 삶의 가치관을 미세 조정하는 것. 이를 위해 인간은 더 자주 자신만의 오두막으로 들어가 ‘지성 독립’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올해는 추석 연휴가 길다. 나는 이번 연휴에도 싱크 위크를 떠나려 한다. 이번에는 멀리 가지 않고 집 근처에서 나만의 오두막을 찾아볼 생각이다. 독자들에게도 권한다. 산책로와 가까운 숙소나 공유 오피스를 지도에서 검색해보라. 꼭 일주일이 아니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몰입과 전환의 공간을 찾아 자신만의 큰 그림을 그려보는 일이다. 오늘 오후라도 휴가를 내며 이렇게 말해보라. “싱크 반차 쓰겠습니다.”

조성익 건축가. 홍익대 교수이자 TRU 건축사무소의 대표 건축가다. 맹그로브 숭인 코리빙으로 한국 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공간과 삶, 그리고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책 『건축가의 공간 일기』를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