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선데이] 흑백요리사와 대학 서열

2024-10-11

넷플릭스 제작 프로그램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 이번 주 모두 공개됐다. 2024년이 아직 몇 달 남았지만, 올해 가장 재미있었던 콘텐트를 꼽으라면 필자는 ‘흑백요리사’라 답할 것 같다. 삼 년째 보고 있는 ‘최강야구’를 밀어낼 만큼 재미와 감동, 여러 가지 생각 거리를 주는 내용이었다.

처음엔 제목에 ‘계급’이 들어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요리 경연까지 계급을 끼워넣었다는 반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계급을 강조한 ‘흑수저 대 백수저’라는 대결 구도도 억지스럽다 싶었다. ‘백수저’의 요리사들이 성취한 바가 뚜렷한 인물들인 것은 맞지만, 그들의 처음이 ‘흑수저’ 요리사들과 달랐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반감은 ‘백수저’ 요리사 20명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80명의 재야의 강자 중에 20명의 ‘흑수저’를 추리는 첫 대결까지만 남아있었다. 20명 대 20명의 경쟁부터는 ‘계급장 뗀’ 심사 방식과 요리사들의 자기 요리에 대한 치열함에 몰입했다.

요리계급전쟁 인기배경엔 능력주의

서열 의식 낳아, 치열한 경쟁엔 피곤

서열화 정점은 국민 줄세우는 대입

다양성 중심의 차별화로 풀어가야

이 프로그램의 영어 제목은 ‘요리 계층 전쟁(culinary class wars)’이다. 흑과 백의 대결은 미국을 포함한 서양에서 달리 해석될 터여서 쓸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전 세계 구독자를 상대하는 넷플릭스가 외국어 번역과 해석의 곤란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흑수저 대 백수저’라는 콘텐트를 만든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계급이나 서열에 민감한 것을 반영하는 듯하다. 서열을 정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공감대가 있지만, 한국인은 특히 무엇에서든 서열을 매기는 성향이 강하다는 학계의 연구도 있고 우리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는 바다.

한국인의 서열 의식은 능력주의에 바탕을 둔다는 점에서 더 강렬한 속성이 있다.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 불과 70여년간 이뤄낸 성장을 돌아보면, 한국은 분명 모두에게 기회가 열려있는 나라였다. 문제는 사회적·경제적 성취가 대체로 능력에 대한 증명이 되고, 조밀한 인구 때문에 서로 어떻게 사는지 훤히 보이다 보니 극도로 피곤한 사회가 됐다는 것이다. 경쟁에서 밀렸을 때의 열패감은 태생적 계급사회에서라면 체념이 될 것이 종종 분노로 바뀐다. 어느 정도 성취한 사람도 능력은 세습되기에 한계가 있어서 조바심에 시달린다. 능력주의와 짝을 이루는 평가에서의 공정성은 강박적으로 추구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서열화의 정점은 대학 입학일 것이다. 대입은 항상 이슈였지만, 사회 문제의 중심에 선 것은 80%에 육박하는 대학진학률 때문인 부분도 있다. 사실상 모든 국민이 본인이든 자녀든 줄서기 경험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대학진학률이 항상 이렇게 높았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만 해도 50%를 넘지 않았다. 대학진학률이 높아진 것은 1994년 대학설립 준칙주의가 도입되면서 이후 10년여간 설립된 대학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학설립 준칙주의는 최소 설립 요건만 맞추면 대학 설립을 허용하는 제도다. 그 전에는 대학 설립 계획부터 최종 설립까지 단계별로 교육부 인가를 받아야 했다.

대학진학률이 높아지면서 대학 서열이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된 것이 문제다. 1982년 수도권정비계획법이 제정된 이후 수도권에서는 대학의 신설이 묶여있는 가운데 수도권 외 지역에서만 대학이 추가된 것도 대학의 지역적 서열화를 부추겼다. 교육 기회와 사회적 불평등에 관한 기존의 이론은 교육 기회를 다양한 계층에 확대하면 불평등이 줄어들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이를 반박하며 등장한 비교적 최근의 이론은 교육 기회의 질적인 차이 때문에 양적인 확대만으로는 불평등이 줄어들지 않는다고 설파한다. 사회의 일부에서는 서열을 ‘원하기’ 때문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질적 차별화가 꾀해진다는 것이다. 대학생 사이에 학교가 드러나는 ‘과 잠바’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대학진학률이 70%를 넘긴 2000년대 중반부터다.

대학의 서열을 약화할 수 있을까. 의대 진학 광풍에 한 가지 힌트가 있다. 전공을 중시하는 경향이 생기면서 대학의 명성 자체는 힘이 줄어든 것이다. 대학들이 다양성으로 경쟁할 수 있으면 설 줄이 여러 개가 되어 서열을 매길 수 없을 것이다. ‘흑백요리사’의 큰 재미 중 하나도 다양한 요리 분야의 대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이었다. 비록 우승자는 한 명이었어도 그들 사이에 정확한 순위가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저출생부터 노후 빈곤까지 교육 문제가 걸리지 않는 데가 없다. 지금 무언가 해야만 한다.

민세진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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