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뉴스는 지나갔지만, 그 의미는 오늘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의 그날’은 과거의 기록을 통해 지금을 읽습니다.<편집자주>

1987년 11월 29일. 버마(現 미얀마) 근해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대한항공 858편(보잉 707)이 공중 폭발하며 탑승자 115명 전원이 사망했다.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아부다비, 방콕을 경유한 뒤 김포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던 비행기는 오후 2시께, 버마 랑군(現 양곤) 지상관제소와의 “정시 방콕 도착, 시간과 위치 정상”이라는 교신을 끝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한항공은 즉각 방콕에 현지 대책본부를 꾸리고 수색에 나섰다. 정부도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International Civil Aviation Organization)에 실종 항공기 수색을 공식 요청하고 태국과 미얀마 측에 협조를 구했다. 외무부(現 외교부) 2차관보를 포함한 조사단도 현지로 급파돼 상황 파악에 나섰다.

◇ “탑승객 명단 속 수상한 일본인"…위조 여권 들통나자 음독 시도=정부와 항공사 모두 테러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비행 경로를 따라 탑승객 명단을 긴급 확인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이 과정에서 일본인으로 등록돼 있던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가 주요 용의 선상에 올랐다.
12월 1일, 바레인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밟던 중 마유미가 가진 여권이 위조된 사실이 확인되면서 이들은 현지 경찰에 체포됐다. 신분이 탄로날 위기에 처하자 이들은 음독을 시도했다. 신이치는 끝내 목숨을 잃었지만 마유미는 혼수상태 이틀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
◇ “외국인 행세하며 진술 거부"…정체는 북한 노동당 소속 ‘김현희’=수사 지휘봉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잡았다. 정부는 사건 배후에 북한이 있다고 판단, 바레인 당국에 마유미의 신병 인도를 공식 요청했다. 12월 15일, 그는 한국으로 압송되면서 본격 조사가 시작됐다. 마유미는 중국어와 일본어를 섞어 말하며 초기 진술을 거부했지만 어설픈 언어 구사와 운항 경로 진술 번복 등으로 허점이 드러났다. 결국 우리 조사팀의 집요한 추궁 끝에 마유미의 본명과 소속이 확인됐다. 그녀의 본명은 ‘김현희’, 소속은 북한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現 북한 정찰총국 해외정보국)였다.

◇ “폭탄은 라디오·술병 위장"…‘서울올림픽 방해’ 지령 수행=이들은 '서울올림픽을 방해하라'는 김정일의 친필 지령에 따라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 작전에 나섰다. 9시간 뒤 폭발하도록 설계된 라디오 위장 폭탄과 액체 폭발물이 담긴 술병을 들고 기내에 잠입했다. 이들은 858편 기내 선반에 폭탄을 두고 내렸고, 기체는 예정된 시각에 공중 폭발했다.
안기부의 수사 결과 발표에 북한은 즉각 반발했다. 1988년 1월 16일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해 “수사 결과는 불순한 정치적 목적의 날조극”이라고 주장하며 책임을 전면 부인했다.
◇ “북한 테러국으로 낙인"…국제사회도 일제히 규탄=우리 정부는 군사적 보복 대신 국제 여론 형성에 주력했다. 외무부는 국제기구와 각국 정부를 설득하며 북한 비난 성명 참여를 요청했고 반(反)테러 공조를 강화했다.
국제사회 반응은 빠르고 단호했다.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고 외교 관계 차원의 접촉을 금지했다. 동시에 “모든 반테러 국가가 북한을 규탄하고 테러 응징에 협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사건은 항공 보안 체제 전반을 뒤흔드는 계기가 됐다. 그해 6월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항공보안 회의에서는 대한항공을 포함한 각국 항공사가 항공범죄 대응 강화 결의를 채택했고 보안 시스템 개선과 국제 공조 체계 강화 논의가 본격화됐다.
◇“서울올림픽 무사 개막"…그러나 김현희는 16일 만에 특별사면=1988년 9월 17일, 테러 위협 속에서도 서울올림픽은 160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성공적으로 막을 올렸다.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모범적인 안전 관리 체계를 입증하며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후 대법원은 1990년 3월 27일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의 범인 김현희에게 사형을 확정됐다. 그러나 불과 16일 만에 특별 사면 조치가 내려졌다. 북한이 폭파 사건 자체를 계속해서 부인하는 상황에서 김현희를 북한의 만행을 증언할 ‘역사의 산증인’으로 남겨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 “태국서 발견된 잔해"…동체 인양은 끝내 미완=사건 발생 3년 후인 1990년 3월, 태국 어부의 그물에 비행기 동체로 추정되는 잔해가 걸려 올라왔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식 결과 압축 충격에 의한 파손 흔적이 확인됐으나 태국 정부는 관할권 밖의 사안이라며 사건을 종결했고 관련 기록은 대부분 폐기됐다. 사건 발생이 30여 년 지난 지금까지도 유해 수습과 동체 인양은 이뤄지지 못한 채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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