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와 친구들

임직순은 1921년, 충북 괴산군 상모면 안보리(수안보)에서 태어났다. 이제 그곳은 충주시로 편입되어 있다. 이웃 친구로, 나중에 조선대 동료 교수가 된 안모 교수는 어린 나이의 운창(雲昌, 임직순의 아명)은 매일 마당에 작대기로 그림을 그렸다고 기억했다.
가세가 기울어 다섯 살 때 그의 가족은 강원도로 옮겨갔다. 임직순이 일곱 살 때 가족은 서울로 왔다. 어린 임직순은 서대문 영천시장의 일본인 철물점에서 일했다. 같은 나이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모습이 부러웠다. 철물점에는 돈통이 있었다. 주인이 가게를 비워도 소년은 돈통에 손을 대는 법이 없었다. 주인은 정직한 소년이 마음에 들었다. 철물점 주인의 배려로 늦은 나이에 근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어 일본의 중학교로 진학하려는 소년의 보증을 서주었다. 주인은 일본까지의 여비와 한 달 치 생활비를 소년에게 건네주었다.
최불암 어머니가 경영한 술집 ‘은성’ 단골

일본으로 건너간 임직순은 신문 배달을 하며 야간 중학교에 다녔다. 조간과 석간, 둘 다 돌렸다. 석간 배달을 마치고 서둘러도 3교시가 되어서야 학교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신문 배달로 번 돈에 어머니 엄임영이 일본인 가정의 잡일을 하며 보내어 준 돈을 보태어 겨우 학업을 마쳤다. 당시 조선에서 건너간 유학생들은 주로 출세가 빠른 상과(상대)나 법과로 진학했다. 임직순도 상과로 진학했다.
그런데 임직순 눈에는 자꾸 그림이 어른거렸다. 동경의 일본미술학교에 다시 입학했다. 선배로는 곽인식·승동표가, 동기로는 임규삼이 있었다. 해방 후 일본에 재입국한 곽인식은 여러 사정으로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는데, 1982년 현대화랑 전시를 계기로 33년 만에 한국에 다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이때 현대화랑이 보증을 서고 임직순이 곽인식의 경비를 보태었다.
1944년, 임직순은 귀국했다. 해방 후 인천여고·서울여상의 미술 교사를 하다 1950년, 숙명여고 미술 교사를 맡자마자 6·25 전쟁이 터졌다. 충북 출신의 친구들이 구해준 서울 대방동의 단칸방에서 부부와 2남 1녀, 다섯 식구가 살았다.
임직순은 술을 좋아했다. 동료 화가들이 모이는 곳은 최불암의 어머니가 경영하는 명동의 ‘은성’이었다. 술을 마시다 통금에 쫓기면 대방동까지 택시를 타고 왔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택시비를 대신 내주었다. 부인 남희남이 이자를 얹어 잘 갚았기에 별 탈은 없었다. 숙명여고 월급날이면 회계를 자임한 명동화방의 민은기 사장이 그간 밀린 미술재료비와 은성의 술값까지 다 받아내었다. 월급은 항상 부족했다.
1957년 제6회 국전에서 ‘좌상’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그들 일가족이 단칸방 신세로 살던 대방동의 집 한 채가 150만 환이었는데 국전의 상금은 100만 환이었다. 대한양회 이정림 회장이 수상작을 사주었다. 상금과 그림값으로 그동안 밀린 빚을 다 갚았다.
이 무렵 임직순은 따로 쓸 돈이 필요했다. 용산 미군 부대 근처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당시엔 그림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란 미군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었다. 1949년에 출생한 아들 원빈이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다. 원빈은 집에서 싸준 도시락을 들고 대방동에서 전차를 타고 용산으로 갔다. 아버지는 다른 화가들과 함께 미군들의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 날씨였다. 부인이 싸다 준 식어버린 도시락을 난로 위에 올려 데웠다. 임직순은 물감을 다 닦아 낸 나이프로 아들에게 사과를 깎아 주었다.
1960년이 되자 임직순에게는 여러 사건이 터졌다. 미술 특기생 입학을 둘러싸고 숙명여고의 이사진과 다툼이 생겨 갑자기 학교를 그만두었다. 여러 학교에 물감·종이 등 미술 재료를 납품하는 회사가 임직순을 바지사장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잠적했다. 졸지에 임직순이 600만 환이나 되는 빚을 지게 되었다. 갚기 힘들 정도로 큰돈이었다.
1961년, 광주 조선대 교수 진양욱이 찾아왔다. 5·16 때 수감을 당한 조선대 교수 오지호가 비운 자리를 임직순에게 맡아 달라고 했다. 조선대가 임직순의 빚 600만 환을 대신 갚아주고 광주에 집도 구해준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숙명여고를 나온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 빚쟁이 임직순에게는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도상봉은 아끼던 후배 임직순이 서울에서 활동하기를 원했다.
갈등하던 임직순은 결국 광주로 갔다. 임직순도 조건을 걸었다. 전시 등의 이유로 광주를 비우면 강의를 몰아서 보충하겠다는 것이었다. 1961년, 임직순의 ‘광주 시대’가 열렸다. 1962년에는 가족 전체가 광주에 정착했다. 드디어 단칸방 신세도 면했다. 광주에 가니 공기부터 빛깔이 달랐다. 채도가 높은 남도의 햇빛을 보았다.
평론가 이경성은 임직순을 일러 “귀신같이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라 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평범한 색상이다. 그런데 임직순이 화면의 여기저기에 색상들을 풀어놓으면 색과 색이 서로를 자극하고, 품어주면서 강렬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색채의 향연이 벌어진다. 화면이 자칫 딱딱해질 수도 있는 민족기록화도 임직순이 그리면 색채 감각과 회화성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학생들은 너도나도 임직순의 세련된 색채 감각에 빠져들었다. 곧 임직순류의 화풍이 형성되었다.
방학이 되면 제주도·홍도·흑산도·완도·보길도 등으로 스케치 여행을 떠났다. 해남 대흥사와 고창 선운사도 빠지지 않았다. 쌀·된장·고추장·간장·참기름을 넣은 짐 보따리를 들고 민가의 방을 하나 잡아 장기 투숙을 했다. 임직순은 어디서고 쉴 새 없이 연필을 움직였다. 숙소에서 그린 러닝셔츠 차림의 자화상이 많은 것도 그 탓이다.
진양욱·오승우 등 광주의 술친구들이 생겼다. 나중에는 제자 황영성이 가세했다. 동료 교수, 학생들과 자주 스케치 여행을 떠났다. 스케치 여행을 갈 때면 조그맣게 자른 베니어합판 위에 장판지를 배접하여 캔버스를 만들었다. 아들 원빈이 아교 바르는 일을 도왔다. 마지막은 징크화이트로 처리했다. 임직순의 그림은 인기가 많았다. 광주 시내에서 팔린 임직순의 그림값은 동료, 학생들과의 여행에 쏠쏠한 도움이 되었다.
1957년 제6회 국전서 ‘좌상’으로 대통령상

임직순은 복싱과 프로레슬링을 좋아했다. 업무차 상경하면 늘 장충체육관을 찾았다. 1966년, 김기수와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의 WBA 주니어 미들급 세계챔피언 타이틀 매치가 열렸을 땐 장충체육관 현장에서 경기를 보았다. 승리의 감동을 실감나게 자식들에게 전해 주었다. 라디오로 권투 중계를 들을 땐 자식들 앞에서 러닝셔츠 차림으로 복싱 동작을 보여주기도 했다. 광주에서는 주로 텔레비전 방송으로 프로레슬링을 즐겼다. 김일의 박치기가 상대방을 쓰러트리면 어린애처럼 흥분했다.
1974년 현대화랑에서 열린 임직순의 개인전은 크게 히트를 했다. 그림을 판 돈으로 서울 중곡동에 집을 사서 거처를 옮겼다. 14년간의 광주 시대가 끝나고 ‘서울 시대’가 시작되었다. 1985년까지는 비행기로 광주를 오갔다.
임직순의 일상은 단순했다. 임직순은 소녀상으로 유명하다. 오전에는 주로 모델 작업을 했다. 오후에는 풍경과 정물을 그렸다. 안방에 바를 설치하여 그 위에 여러 점의 그림을 놓고선 텔레비전을 볼 때도 그림들을 쳐다보며 조형의 진행을 상상했다. 종일 그림만 그렸기에 그림을 쉬는 점심시간이 몹시도 즐거웠다. 생선과 메밀국수를 좋아했다.
임직순은 연필·콩테·색연필로 쉬지 않고 스케치를 했다. 새벽에 아차산을 오르면 서너 점의 스케치를 해왔다. 에코백에는 스케치북 서너 권, 필통이 꼭 들어 있었다. 풍경 속에서 마음에 드는 구도를 잡아 스케치한 후 이를 재해석하여 캔버스에 유화로 그려나갔다.
1996년, 심부전증이 심해졌다. ‘그림을 더 단순하게 그려야 하는데. 빛을 더 섬세하게 감지해야 하는데.’ 대가의 아쉬움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병원을 나와 집으로 갔다. 자신의 그림들을 하나씩 손으로 더듬었다. 마지막 필촉(筆觸)이 거기서 멈추었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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