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월 15일 내란특검팀은 “피의자가 영상녹화 조사를 거부해 일반 조사 중”이라며 “피의자가 진술을 거부하고 있지만, 질문을 다 소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를 두고 피의자의 수사 비협조를 비판하는 시각이 있을 수 있다. 반면 제도 개선의 관점에서 피의자가 거부하더라도 영상녹화를 할 수 없는지, 피의자 조사 시 반드시 질문과 답변으로 이뤄진 조서를 작성해야 하는지 등 피의자신문의 방식과 모습이 앞으로 어떻게 개선돼야 하는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영국과 미국, 조서 작성 대신 메모·보고서 작성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만의 독특한 수사구조에 갇혀 수사기관이 피의자를 소환해 범죄를 추궁하는 신문조서가 당연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근대 형사소송 절차의 모범이 된 미국과 영국, 독일은 그렇지 않다. 영국과 미국 모두 조서를 작성하지 않고, 메모나 보고서를 작성할 뿐이다.
조서를 작성하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조선말을 모르는 일본인 판사를 위해 시작된 것인데, 해방 후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존속하고 있다. 검사총장에서 유래된 검찰총장이라는 명칭, 상명하복만이 강조되는 검사동일체 원칙, 법률에 근거가 없는 피의자 소환권 등은 모두 일제가 남긴 잔재와 상처다. 해방 후에도 검찰 조서는 공안 통치를 유지하고 독재정권을 강화하는 매우 유용한 도구로 악용됐다. 법원이 이를 용인, 합세하는 일명 조서재판의 존재로 가능한 일이었다.
피고인이 고문을 받고 꾸며진 조서라고 주장하더라도 법원은 일단 검찰 조서의 증거능력은 인정하고, 그 뒤에 조서 내용을 믿을지 말지의 증명력의 문제를 따졌다. 증명력 판단으로 가더라도, 법원은 법정에 나온 증인의 말보다 검사가 검사실에서 작성한 조서를 더 믿었다. 조서가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공판 관여 검사는 조서에 기재된 대로 진술한 것은 맞지 않냐고 다그치기 일쑤였다. 이처럼 판사도 조서를 더 믿었기 때문에 공판중심주의는 공허한 원칙으로 전락했다. 이런 재판환경에서 조서재판, 검찰에 의한 재판의 지배가 이루어졌다.
미국의 저명한 형사법학자인 리처드 A. 레오 교수는 <허위 자백과 오판>에서 “미국의 경험적 연구 결과 수사관들은 결코 중립적이거나 불편부당하지 않고 대단히 편파적이고 전략적이며 목표지향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한국의 제도는 미국보다 더욱 검찰 중심적이고 더욱 자백 증거에 의존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특히 미리 결론을 정해 놓고 수사에 착수하고 수사를 진행하는 이른바 표적수사, 하명수사, 정치적 수사의 경우에는 불공정한 수사와 허위 자백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대검 감찰부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실제 특수수사를 지휘하는 검찰 고위 간부로부터 중요 사건에서 어떻게든 찾아내면 범죄가 있을 것이므로 피의자를 구속하고 기소하는 성과를 내지 못하면 무능한 검사라는 평가를 받는다는 놀라운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국민 사이에 “조서를 꾸민다”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말이 생겨났을 것이다. 범죄사실과 직접 관련이 없는데도 피의자의 이미지를 나쁘게 만드는 질문을 연이어 던지고 답변을 제대로 못 하면 연극 대본의 지문처럼 ‘이때 고개를 숙이고 묵묵부답하다’,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다’와 같은 표현을 적어놓는다. 판사들이 이러한 조서를 읽으면 자연 피고인에 대해 부정적인 심증을 갖게 마련이다. 이것을 검사와 수사관은 잘 알고 있다.
레오 교수의 말대로 피의자신문은 검찰의 조직과 문화와 행동을 보여주는 소우주와 같다. 우리나라에서 유능한 특수부 검사는 피의자에 불리한 질문을 잘 생각해내고 구조적으로 잘 배열하는 검사다. 언론에 보도되는 중요사건에서 피의자신문조서의 질문 문항을 만들기 위해 검사 여럿이 달라붙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공을 들이는지 국민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많은 형사사건을 처리해 본 복수의 검사가 유죄의 심증을 강화하도록 잘 짜인 피의자신문조서의 그물망에서 피의자가 벗어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피고인과 증인의 말보다 검사의 말과 수사기관 조서를 더 믿는 재판 현실에서 더욱더 그렇다. 2022년부터는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도 조서 기재가 사실과 다르다고 피의자가 부인하면 증거능력이 부정되는 것으로 개정됐다. 그런데도 검사 피의자신문조서는 피의자에 대한 조사 횟수와 시간에 관한 제한 없이 여전히 작성되고 있고, 법정에 증거로 제출되고 있다. 반면 한명숙 전 총리 사건, 이화영 경기 부지사 사건 등 검찰 특수수사같이 경찰의 피의자신문 과정에서 과도한 소환과 부당한 회유, 압박 사례가 있었다고 보고된 바는 없다.
영상녹화가 조서보다 실체적 진실 발견에 도움
수사와 기소의 완전 분리, 더 정확하게는 공소청의 보완수사권 등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수사권을 부여하지 않는 방향으로 법 개정이 이뤄진다면 향후 검찰이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이후에도 수사를 담당하는 국가수사본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등은 여전히 피의자를 신문할 것이므로, 허위자백 및 인권침해의 위험을 배제하는 적법한 수사방식을 제도 개선 차원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독일의 검찰은 ‘손 없는 머리(Kopf ohne Hande)’로 불린다. 검찰은 수사권은 있으나 수사 인력이 없고, 실제 수사를 하지 않고 경찰을 통해 수사할 뿐이다. 또한 수사기관의 조서는 문답식이 아니라 진술 요지를 기재하는 방식에 의한다. 피의자신문조서는 공판에서 피고인이 조서의 낭독에 동의하는 경우에는 낭독된 조서의 내용이 피고인에 유죄의 증거로 사용될 수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2020년부터 피의자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피의자신문의 녹화, 녹음 즉 영상녹화를 재량껏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취지는 영상녹화가 조서보다 실체 진실 발견에 도움이 되고, 불법 부당한 신문을 방지하는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에도 피의자신문은 원칙적으로 경찰이 진행하고 검사는 피의자신문을 하지 않는다. 수사기관이 피의자를 면담하거나 신문(interrogation)한 경우에도 수집된 진술이 기재된 기록을 작성할 의무도 법에 정해져 있지 않다. 이는 수사기관이 형성한 심증이 조서를 통해 판단 주체에 그대로 인계되는 것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 특히 허위 자백과 인권침해 위험을 배제할 수 있는 가장 쉽고 중립적인 방안은 경찰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자녹화하는 것이라는 견해에 따라 많은 주에서 영상녹화를 시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영국도 1984년 경찰과 형사증거에 관한 법률에 지정돼 전체과정의 녹음 또는 녹화가 의무화됐다.
검찰개혁의 과제로서 수사와 기소의 완전한 분리라는 큰 방향에서 정부조직법이 개정됐다. 이제는 실제 수사 과정에서 실체 진실 발견과 인권보장이라는 형사소송의 이념을 구현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기존의 피의자신문조서는 우리나라 특유의 낡은 증거 방법이다. 이제 피의자를 상대로 묻고 답하는 방식의 조서 폐지와 영상녹화 확대를 고민할 시점이다.
<한동수 변호사·전 대검찰청 감찰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