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우리 일이, 내일의 내 일

2024-10-16

사회 변화에 대해 20년 넘게 강연을 해 오면서 알게 된 것은, 강연이 끝난 후 듣는 이들의 의견이 대략 다음의 두 가지로 압축된다는 것입니다. 그 첫번째는 “우리보다 우리 임원들에게 들려주세요”이고, 두 번째는 “그래서 우리 애는 무엇을 가르칠까요?” 입니다. 후일 강연 만족도를 분석해보며, 위 두 가지 의견들이 모두 나온 날은 강연이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업종과 대상자가 달라도 매번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을 보면, 우리네 사람들의 행동은 상당히 유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의 이야기들이 빈번하게 나오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유추해 보아야 합니다.

나중을 위해 지금을 희생하던

생존만을 위한 시대는 저물어가

삶을 결정된 것처럼 여기지 말고

새로운 일 쌓아 자산 되게 해야

첫번째 의견은 ‘내가 짐작했던 사회 변화가 맞았구나’라는 사실을 강연을 통해 확인한 이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변화의 방향을 알고 있기에, 그에 맞춰 조직을 바꾸려다 세대가 다른 이들의 공감을 얻지 못해 벽에 부딪힌 아픔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신이 옳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제 강연을 통해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답답함을 토로합니다.

두번째 의견은 조금 더 수동적인 이야기입니다. 변화를 이제 확인한 후, 자신을 돌아보니 스스로를 바꿀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정해졌다 생각한 나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보다, 다음 세대를 준비시키는 것이 현실적으로 옳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나는 됐고! 우리 아이나 구해줘” 라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첫번째 이야기 속, ‘나’는 조직에서 관망의 태도를 보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변화를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각자 다른 속도의 삶을 사는 이들이 모인 조직이 일시에 그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함께 논의하고 합의해 나가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게다가 조직 내 역학까지 작용하며 혁신의 의지가 무뎌져 감을 느낍니다. 출발은 뜨거웠으나 어느덧 쉽게 바뀌지 않는 삶이 편안하게 느껴지면, 결국 ‘우리 임원’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구성원 모두’가 문제가 되고 맙니다.

두번째 이야기 속, ‘나’는 내 삶의 가능성을 제거하고 있습니다. 바쁜 삶의 템포를 맞춰가는 것도 쉽지 않은데, 앞으로 올 세상까지 준비하기는 버겁기만 합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 아이에게 늘 죄책감을 느끼기 일쑤입니다. 우선순위를 선택한다면 ‘이미 정해진 듯’ 보이는 내 삶보다 ‘앞으로 펼쳐질’ 내 아이의 삶이 더 합리적이라 생각합니다. 나와 아이를 모두 고르는 옵션은 보이지 않고, 희생이 낳은 선택처럼 아이를 위한 걱정에 몰입하게 됩니다. 걱정은 혼란으로, 다시 잘못된 추종으로 번져갑니다. 잘 몰라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두렵기에 ‘뭐라도 하는’ 모드로 아이의 일과를 채우며 나의 불안을 잠재우려 합니다. 무엇보다 그것에 몰입하며 정작 나의 삶은 돌보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을 눙치려 합니다.

위의 두 가지 이야기가 모두 슬픈 이유는 전부 ‘내’가 빠진 이야기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조직의 일원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일하는 이유 역시 나의 발전을 위해서가 먼저입니다.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선택한 삶에서 어느덧 내가 제외되고 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아이를 키우려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을 살며 아이도 돌보는 것입니다.

길지 않은 시간을 살아온, 그리고 훨씬 더 긴 시간을 살아갈 나는 언제부터인가 내 삶이 이미 ‘결정된 것’처럼 살고 있다 생각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핵개인은 운명론을 거부합니다. 수많은 가능성이 빛나고 있는 새로운 세상에서 나의 미래는 앞으로도 몇번의 기회를 더 가지고 있음을 각성합니다.

몇해 전 중학교를 졸업하는 이들에게 한 저의 축사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얼마 전 제가 뒤늦게 깨달은 것은, 중학교는 고등학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고등학교는 대학교를 위해 준비하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당연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사실을 이제서야 알게 된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고난을 겪는 주인공이 등장하던 예전 동화의 마지막 문장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로 끝났습니다. 그 시절 세상은 미래를 위해 지금의 삶을 온전히 투자하기를, 경쟁을 위한 고행을 하기를 강권했습니다. 이솝 우화 속 ‘개미와 베짱이’를 배우고, 입시만을 위해 중고등학교의 늦은 밤을 하얗게 지새우던 시대가 이제 끝나가고 있습니다.

나중에 잘 사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잘 살기를 바랍니다. 저축의 시기와 연금의 시기로 이분법처럼 나누어진, 생존만을 위한 삶이 아닙니다. 여명을 위해 계좌에 쌓일 금전만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일을 쌓고 그 일이 나의 자산이 되는, 오늘과 내일이 모두 충만한 삶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 일이, 내일의 내 일이 되는 세상이 오고 있습니다.

송길영 Mind M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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