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탕평채라는 것은 녹두유(綠豆乳)와 돼지고기, 미나리 싹(芹苗)을 실같이 썰어 초장(醋醬·초간장)을 뿌려서 만든다. 매우 시원하여 봄날 밤에 먹으면 좋다.”
이 글은 서얼 출신으로 정조에 의해 규장각 검서관에 발탁된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이 쓴 ‘경도잡지(京都雜志)’의 ‘주식(酒食)’에 나온다. 녹두유는 녹두포(綠豆泡)라고도 불렸다.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사람들이 녹두유나 녹두포를 ‘청포(淸泡)’라고 부른다고 했다. ‘청포’의 ‘청’은 투명하다는 뜻이고 ‘포’는 두부나 묵을 부르던 조선식 한자다. 곧 지금의 청포묵이다.
1924년에 출판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는 “녹두를 불려 껍질을 벗기고 맷돌에 간 다음 면(무명) 전대에 넣고 한참을 주물러 거른다. 거른 것을 가라앉혀 웃물은 따라내고 가라앉은 것으로 묵을 쑨다. 솥에 붓고 불을 때어 휘저어 끓여 익힌 다음 그릇에 퍼놓아 굳힌다”라고 했다.
1940년 6월 조선식찬연구소(朝鮮食饌硏究所)를 운영하던 홍선표는 ‘조선요리학’에 “예전에는 우리 조선에서도 묵을 그대로 기름에 부쳐 먹을 줄은 알았지마는 묵에 숙주나물이나 그 외 나물을 섞어 먹을 줄을 몰랐던 것이나, 200여년 전 영조 때 노소론(老少論)을 폐지하자는 잔치에서 묵에 다른 나물을 섞어 탕평채라 하였다”고 적었다. 홍선표의 이 주장은 최근까지도 ‘사실’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영조와 관련된 어떤 문헌에서도 탕평채와 관련한 글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조재삼(趙在三, 1808∼1866)은 ‘송남잡지(松南雜識)’(1855년)에서 탕평채의 시작을 다른 곳에 뒀다. 그는 “녹두묵에 쇠고기·돼지고기를 섞어서 만드니 바로 나물 골동(骨董·비빔)이다. 송인명이 젊은 시절에 가게를 지나가다가 탕평채 파는 소리를 듣고 사색(四色)의 당인(黨人)을 섞어 등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탕평사업을 하였다고 한다”고 적었다.
송인명(宋寅明, 1689∼1746)은 영조 때인 1740년 좌의정이 된 후 당쟁을 억누르며 탕평책을 강하게 추진한 인물이다. 아마도 그런 사정으로 조재삼은 ‘탕평채’를 송인명과 연결한 것으로 여겨진다. ‘탕평(蕩平)’이란 단어는 공자가 편찬한 ‘서경(書經)’의 ‘홍범(洪範)’에 처음 등장한다. 탕평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의 ‘탕탕평평(蕩蕩平平)’의 줄임말이다. 영조는 27명의 조선 임금 중에서 가장 많이 탕평책을 논의한 왕이다. 하지만 80세의 영조는 자신이 탕평을 완성치 못했다고 밝혔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년) 3월 편에는 유득공의 조리법에 김이 보태졌다. 투명한 청포묵, 회색 돼지고기, 푸른 미나리 싹, 검은색 김이 사색당파라면 조선간장에 식초를 섞은 초장이 조화의 맛을 낸다. 그래서 많은 한국인이 탕평채가 탕평책에서 나왔다는 말을 받아들였다. 1980년대까지 탕평채는 한정식 음식점의 대표 메뉴였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기름지고 화려한 음식이 식탁 위를 장식하면서 탕평채의 인기가 시들해졌다. 장기간 이어졌던 내란정국으로 봄이 봄 같지 않았다. 이럴 때 입속을 시원하게 뻥 뚫어줄 탕평채를 먹자. 탕평채 맛의 핵심은 담백함이다. 유득공도 “매우 시원하여 봄날 밤에 먹으면 좋다”라고 말하지 않았나.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속학 교수·음식 인문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