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정규직 문제는 더 이상 고용
문제만이 아니라 ‘거대한 차별’
이라는 한국 사회의 지속 가능성과
공정성에 대한 사회적 문제다.
정치가 외면하고, 기업이 회피하고
정규직이 침묵할수록 이 구조는
더욱 견고해진다. 가장 큰 대가를
치르는 것은 미래 세대가 될 것이다.
견딜 수 없는 이중구조
한국의 고용시장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이중구조에 갇혀 있다. 전체 취업자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 형태로 일하고 있으며, 이 중 다수는 낮은 임금, 고용 불안정, 사회보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같은 일을 해도 다른 대우를 받는 현실’이 정당하다고 믿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문제는 이를 고치려는 실천이 없다는 점이다.
특히 현대중공업 사례는 한국 고용 구조의 병폐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른바 ‘조선 빅3’ 중 하나인 이 기업은 연간 수조 원의 매출을 올리면서도 정작 하청과 재하청을 통해 최저임금 수준의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있다. 정규직 노동자와 하청노동자의 임금은 2~3배 이상 차이가 나고, 근무 환경은 안전과 복지의 질에서 극단으로 갈린다. 이 불합리한 구조를 청년들이 외면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청년들이 현대중공업과 같은 기업에 취업을 꺼리는 이유는 일자리의 ‘수’가 아니라 ‘질’ 때문이다. 청년이 떠난 자리는 외국인 저임금 노동자가 메우고 있고, 산업의 지속 가능성은 그만큼 흔들리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단지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의 주요 대기업 상당수는 정규직 일자리 대신 협력사에 외주를 주고, 하청구조를 통해 고용책임과 비용을 회피해 왔다. 그 결과, 생산 현장에는 ‘가짜 정규직’, ‘사내하청’, ‘특수고용’, ‘플랫폼 계약직’이라는 이름의 비정규직 군단이 등장했다. 이 구조는 단순히 고용의 문제를 넘어 임금 격차 확대, 소비 위축, 출산 포기, 계층 이동 차단, 복지 재정 부담 증가라는 일련의 사회적 비용을 야기한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이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공공부문 정규직화는 일부 실현되었지만, 민간 부문에서는 ‘기업 자율’이라는 미명하에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선거철마다 등장하는 ‘좋은 일자리 공약’은, 막상 선거가 끝나면 대기업의 눈치를 보는 정치로 변한다. 이 구조는 바뀔 수 없다는 체념이 만연하고, 그 틈에서 수백만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매일 ‘대체 가능한 존재’로 취급받고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바로 정규직 노동자들의 침묵과 무관심이다. 노동운동의 역사적 성과로서의 정규직 고용은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그 고용안정이 비정규직의 희생 위에 성립되고 있다는 점도 외면할 수 없다. 대기업 정규직이 자신들의 임금과 처우를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소극적이거나, 혹시라도 거부감을 갖는다면 노동의 연대는 허울뿐으로 되고 만다. 이제는 정규직 노동자들도 “같은 일에는 같은 권리”라는 원칙에 실천으로 동참해야 한다. 비정규직 문제는 비정규직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구조가 유지되는 한, 언젠가는 모든 노동자가 ‘불안정한 미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비정규직 사용 사유 제한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
대기업 원청 책임 강화
청년 정규직 채용 유도
그렇다면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첫째, 비정규직 사용 사유 제한제를 도입해야 한다. 유럽 주요국은 정당한 사유 없이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 없도록 법으로 명시하고 있고, 반복 계약은 자동 정규직 전환 대상이다. 한국 역시 ‘2년 이상 근무 시 전환’이라는 조항이 있으나, 현실에서는 계약을 끊고 다른 사람을 다시 뽑는 식의 회피가 만연하다. 이를 막기 위한 실질적 규제가 필요하다.
둘째,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강제화해야 한다.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는데 임금과 복지가 큰 차이가 난다면, 이는 헌법의 평등권을 보장하지 못한다. 법률로 그 원칙을 명확히 하고, 위반 시 사용자에게 제재를 가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대기업 원청은 책임 강화로 사회적 책무를 다해야 한다. 하청구조로 고용책임을 분산시키는 관행은 이제 멈춰야 한다. 원청은 하청노동자의 임금, 안전, 고용안정에 대해 일정 수준의 법적·재정적 책임을 져야 하며, 이를 강제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넷째, 청년 정규직 채용을 유도하는 보조금과 세제 인센티브 제도를 강화해야 한다. 정규직 채용 기업에는 분명한 이익이 돌아가도록 정책을 설계해야 하며, 이와 함께 청년에게는 지속 가능한 직무 교육과 전환 기회를 병행 제공해야 한다.
비정규직 고용 선진화 없이
‘사회대개조’는 불가능하다
비정규직 문제는 더 이상 고용의 문제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의 지속 가능성과 공정성에 대한 사회적 문제이다. 정치가 외면하고, 기업이 회피하고, 정규직이 침묵할수록 이 구조는 더욱 견고해진다. 그러나 침묵은 면죄부가 아니며, 침묵 속에 가장 큰 대가를 치르는 것은 미래 세대가 될 것이다.
계엄 이후 일련의 사태를 거치면서 “민주주의의 재도약과 사회대개조”가 대선의 화두가 되고 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비정규직 사태”는 거의 거론되고 있지 않다. 거대한 차별의 중심에 있는 비정규직 고용을 선진화하지 않고 어떻게 사회대개조를 말할 수 있는가? 거대 정치권이 이 부조리를 회피하는 것은 “비정규직의 희생”을 강요해 기득권을 누리는 사회에 편승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빛의 혁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대한민국은, 비정규직 공화국이 아니라 국민 70% 이상이 정규직인 나라, 그래서 미래 세대가 희망과 안정, 복지와 존엄을 누리며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나라이기를 바란다.
안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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