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급차를 타기 시작한 뒤로 세상이 살 만하다는 생각은 무너졌다.
8년 차 소방관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소방관에는 불을 끄는 진압대원, 산을 타거나 물로 뛰어드는 구조대원, 그리고 구급차로 출동하는 구급대원이 있다. 구급대원으로만 8년째 일하고 있는 그는 이 일을 ‘동네북, 주취자 처리반, 피투성이 소방관’이라고 설명한다. 상상도 못 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크기에, 소방서에서도 기피 부서다.
새벽마다 119에 전화하는 술 취한 사람, 삼촌뻘의 남편에게 매일 맞는 외국인 아내, 어린 딸이 보는 앞에서 샤워 호스로 목을 매는 우울증 엄마, 욕창에 시달리다가 쓸 수 있는 한쪽 팔로 119에 전화해 선풍기 틀어 달라는 남자-. 구급차에서 세상의 그림자를 너무 많이 봤다. 8년을 봐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장면들을 첫 책 『당신이 더 귀하다』(다산북스)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저자 백경(필명)을 전화로 만났다. 지방에서 근무하는 40대 소방관이자 두 딸의 아버지라고만 했다. “최대한 각색했어도 책에 쓴 이야기들이 당사자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어서, 또 내 이름을 알리기 위해 쓴 책이 아니기에” 근무지ㆍ얼굴ㆍ이름을 가렸다.
대학에서 영상을 전공한 후 입시학원 시간강사를 하며 틈틈이 독립영화를 찍었다. “20개월이 돼서야 첫걸음마를 뗀 딸을 지켜보다가 부랴부랴 소방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고 돌아봤다. ‘어쩌다 공무원’이 됐는데, 1년쯤 일하자 자꾸만 눈물이 나고 불안해졌다. 순직률보다 자살률이 더 높을 정도로 소방관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은 극심하다. 살린 사람들보다 간발의 차로 살리지 못한 사람들 생각을 떨치지 못할 때,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 다 못하고 나쁜 일이 생길까 봐 불안감에 시달릴 때, 글을 썼다.
여전히 병원의 약물 처방과 상담 도움도 받지만 4년 전부터 매일 새벽 5시에 글을 쓰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브런치와 X에서 ‘백경’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다. “‘모비 딕’의 에이허브 선장처럼 세상의 힘들고 슬픈 일을 정면으로 마주해 이겨내고 싶어서, 또 흰 거울처럼 세상을 그대로 비추고 싶어서요.”
곧 명절 연휴다. 휴가는커녕 전국 소방서가 비상 대기에 들어가는 때다. “크리스마스나 명절처럼 따뜻한 때가 그렇지 못한 분들에게는 더 힘든 시기”라며 “멀리 이동하기에 사고도 잦다”고 그는 설명했다. 명절 수칙을 묻자 당부가 이어졌다. “집을 나서기 전 냉장고를 제외한 모든 전기 콘센트를 뽑으세요. 화장실 환풍기도 꺼야 합니다. 보조 배터리나 충전하는 배터리 제품들이 연결돼 있으면 화재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고속도로 이동하시기 전에 차량에 소화기 구비해 두세요. 뿌리기만 해도 마찰력 높일 수 있는 스프레이 체인도 유용합니다. 열차 플랫폼이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아이 잃어버리는 분들도 많으니 아이들 잘 챙기시고. 떡 드시기 전에 하임리히법 영상도 숙지하시면….” 도처에 위험이 끝이 없다. 특히 이번 명절 그의 가장 큰 걱정은 이것.
구급차를 타고 보니 가난은 유별난 게 아니었다. 예상보다 광범위하게, 뿌리 깊게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었다. 거기서 만난 이들이 가난을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지 말았으면 했다. 어려운 살림에도 커피 한 잔이라도 하라며 어떻게든 감사 표시를 하고 싶어하는 모습에서는 ‘세상은 아직 살 만 하구나’ 싶다. “읽는 분들이 세상의 어두운 면을 외면 말고,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다 여기고 손 내밀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8년 차 소방관 저자의 새해 소망은 단순하다.
다들 아프지 말고, 다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