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음식을 먹고 삼키는 일이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음식을 먹었으나 이내 구토를 해버린다. 몸은 말라가고 신체기관도 망가진다. ‘먹는 행위’를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섭식장애’ 환자들 이야기다. 섭식장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어떻게 치료하는지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당사자와 가족 모두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질환이면서, 진단·치료체계도 허술하기 때문이다.
최근 의료기관에서 거식증·폭식증 등의 섭식 장애 진단을 받은 인원이 증가하고 있다. 특히 젊은 여성층에서 섭식장애 발생이 두드러지고, 10대 환자도 늘고 있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섭식 장애를 진단받은 인원은 최근 5년새(2019~2023년) 58.7% 증가했다. 이중 10~30대가 절반 이상(57.3%)이다. 이 수치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게 당사자와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섭식장애에 관한 인식과 제도 모두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당사자·연구자들이 참여하는 ‘제3회 섭식장애 인식주간’ 행사가 오는 2월 24일부터 3월 2일까지 열린다. 지난 1월 13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인식주간 행사 기획자이자 <삼키기 연습>(2021)의 저자 박지니 작가와 의료인문학자인 유기훈 서울 종로구 정신건강센터장(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섭식장애와 페미니즘의 관련성 등을 연구한 강의영 연구자(서강대 대학원 사회학 박사과정)가 ‘한국에서 섭식장애 치료의 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두고 좌담을 진행했다.
-섭식장애에 관해 개인적·사회적 의미를 설명한다면.
박지니(이하 ‘박’) “섭식장애를 20여 년 경험한 당사자로 이 질환의 역사·사회적 맥락, 치료법과 치료 인프라를 주제로 공부해왔다. 섭식장애에 관한 인식이 왜곡돼 있고, 관련 정책·제도가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2023년 첫 인식주간 행사를 열었다. 섭식장애는 원인과 증상에서 다양한 유형을 보이는데, 나라마다 사회적 맥락에서 다른 문제를 보인다. 1960~1970년대 섭식장애를 사회적으로 인식한 일본에서는 ‘섭식장애는 엄마 탓’이라는 고정관념과 싸워야 했다. 1990년대 섭식장애가 수면 위로 올라온 한국에선 ‘슈퍼모델이 되고 싶은 여성의 질환’이란 인식이 생겼다. 피상적인 인식이 이 질환의 치료, 해법을 어렵게 만든다. 이를 깨고 싶다.”
강의영(이하 ‘강’) “열다섯 살 때부터 거식증의 형태로 섭식장애를 경험했다. 어렸을 때는 미디어에서 그리는 거식증이 매우 부정적으로 다가와서 외면하고 있다가, 지난해 섭식장애 경험자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당사자의 발화가 위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사회학 연구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봤다. 섭식장애는 역사적으로 여성들의 저항이라는 맥락에서도 이해됐다. 한편 페미니스트이면서 섭식장애를 경험한 이들은 ‘몸에 집착하는’ 섭식장애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한다. 철학, 윤리, 사회학 등의 분야에서 섭식장애에 대한 다양한 담론이 더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기훈(이하 ‘유’) “임상 현장에서 섭식장애 당사자분들을 처음 만났다. 국내 치료 지침이 체계화돼 있지 않았고, 최선의 치료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고민이 많았다. 장애학 전공자로서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2023)를 번역하고, 또 최근에 <인식적 부정의>(2025)란 책을 번역하면서 섭식장애 당사자들의 경험을 설명할 언어가 더 풍성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식적 부정의’(소외된 사람들의 말이 신뢰받지 못함으로써, 혹은 자신의 경험을 설명할 언어가 없음으로써 발생하는 부정의) 차원에서 보면, 섭식장애 당사자들은 잘 신뢰받지 못하고, 자신의 경험을 설명할 언어 또한 부재한다. 이런 부정의 속에서 피해를 보지 않도록 의료현장에서 평등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섭식장애 치료체계가 매우 부실하다고 하는데.
유 “장애 운동에서는 의료화된 언어에서 벗어나자는 흐름이 주류인데, 섭식장애와 관련해선 아예 의료적 치료체계 자체가 정립돼 있지 않아서 그것을 원하는 목소리가 주효하더라. 의료 패러다임의 협소함을 지적하는 것이 다른 질환·장애 당사자의 주요 요구라면, 섭식장애는 그 협소한 체계나마 구축돼 있지 않은 상황인 거다.”
박 “맞다. 외국에 있는 분들에게 한국에서 섭식장애 당사자는 역설적인 위치에 있다고 얘기한다. 개인적으로도 정신과 치료에서 좋은 경험을 하지 못했는데도, 치료 시스템을 어서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 “저의 경험처럼 섭식장애는 우울증 등 다른 질환의 하위 질환에서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의학적으로는 정의가 너무 협소하다. BMI(체질량지수)나 구토 횟수와 같은 양적 정의로는 다양한 섭식장애를 담지 못한다. 매일 음식을 잘 못 먹는데도 BMI가 정상이면 ‘적합한 섭식장애 환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거다.”
박 “예전에 입원 병동에 있을 때 스스로는 체중이 중요하지 않았는데 병원에선 BMI만 중요하게 봤다. 살찌기 싫어서 거짓말을 한다고, 뇌에 영양공급이 안 돼서 상담은 소용없으니 체중부터 늘려야 한다는 처방을 받았다. 이런 게 ‘인식적 부정의’인 거다.”
-섭식장애 치료체계는 어떤 것부터 만들어가야 할까.
유 “실태조사가 먼저 필요할 것 같다. 5년 주기 정신건강 실태조사에 반영해도 되고, 정부가 별도의 사업으로 시행해도 되리라 생각한다. 실태조사를 통해 중앙정부 차원의 기관에서 치료전략을 만들고 지역 거점기관에 지원센터를 만드는 일본 모델도 가능할 것이다. 한국은 섭식장애 전문가가 손에 꼽을 만큼 적다. 치료인력을 육성해야 하고, 쉼터나 위기 카페와 같은 대안적 공간도 필요하다.”
박 “유병률 조사는 필수적이다. 다만 일각에선 치료받을 환자가 별로 없는데, 전문인력과 인프라가 만들어질까 이런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역으로 인력과 인프라가 없어서 환자가 모습을 못 드러내는 측면이 있다.”
유 “조사를 통해서 미충족 의료수요가 확인되면 전문인력과 인프라를 구축할 필요성도 확인될 것으로 생각한다.”
박 “해외 사례를 보면 치료체계를 만들 때 당사자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의사결정 구조로 돼 있지만, 한국은 그런 구조는 아니다. 우려되는 부분이다.”
강 “개인적 경험으로 보면 진단 후 치료하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한 달에 100만원 이상 들어가기도 한다. 비급여 비약물 치료가 필수적인데 건강보험 급여화가 이뤄졌으면 한다. 병원이 아닌 선택지도 있으면 좋겠다. 섭식장애 당사자들을 만났을 때 공통으로 하는 말이 있다. 미디어에서 재현하는 섭식장애의 이미지가 굉장히 유별나고 극단적인 경우가 많아 이 질환을 숨기게 됐다는 것이다. 미디어에서 섭식장애를 다룰 때 가이드라인은 있었으면 한다. 소아·청소년의 유병률이 높아서 중요하다.”
-3회 인식주간 행사에서는 호주·이탈리아·일본의 상황을 다룬다.
박 “서구권에서는 ‘자선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져 섭식장애 자선단체가 꽤 있다. 호주의 경우는 자선단체의 활동을 확장해 2009년에 국가조직이 만들어졌고, 2023년에 국가 차원의 치료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섭식장애 치료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 일본도 2012년 치료 가이드라인을 만들었고, 2014년엔 전국 단위의 지원센터가 설립됐다. 일본은 1987년 당사자 단체가 설립됐고, 소규모의 당사자 모임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1997년엔 전문가들이 섭식장애 학회를 만들었다.”
강 “일본은 1960년대부터 어떤 질환에 대해 지역 기반으로 한 당사자 단체들이 활발히 활동했다. 국가, 정당 등 공식적인 조직들로부터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울 때 지역 기반의 자조모임이 접근성 있는 선택지로 역할을 해왔던 것 같다.”
-한국에선 왜 섭식장애 당사자들이 잘 드러나지 않나.
박 “섭식장애 당사자와 가족은 매우 지쳐 있다. 진단을 받기도 어렵고 치료하면서 마음의 상처도 많이 받는다. 비용도 많이 든다. 당사자들은 모이면 서로의 몸을 비교하면서 괴로움을 느낀다. 더욱이 외부에서 아무 지원이 없어서 당사자들이 나서기는 쉽지 않다. 비수도권에서 1년 동안 당일치기로 서울의 병원을 오간 고등학생과 어머니가 있다. 그 어머니가 훌륭하게 치료에 임하는 분이어서, 인식주간 행사에 와달라 요청했는데 답을 받지 못했다.”
-3회 인식주간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유 “일본 사례를 보면 교육자에 대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섭식장애 치료자에 대한 가이드라인도 필요하다. 인식주간 행사에서 교육자와 치료자, 전문가들이 더 많이 참여해서 문제의식을 나누면 좋을 것 같다.”
강 “당사자의 발화가 다른 당사자의 발화에 굉장히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인식주간과 같은 행사나 다른 어떤 계기가 많이 마련돼서 각자의 질병 서사나 서로 다른 담론을 풍부하게 나눴으면 좋겠다.”
박 “인식주간 1~2회 때 당사자 목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분들이 인식주간 이후로 많이 변화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3회에선 보건학자, 사회학자, 여성학자, 소설가 등 연구자들이 주요 패널로 참여한다. 인식주간 행사는 ‘한국은 왜 섭식장애 환자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까’란 질문, 감정적으로는 ‘억울함’을 동력 삼아 인식주간 행사를 사비를 털어 기획·진행한다.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십시일반 후원한다. 다만 이번엔 탄핵 시국에 다른 사회적 의제에 관한 관심이 줄면서 기업 후원을 받지 못해 인식주간 행사가 축소 운영될 가능성도 있다. 행사 개최가 벅차긴 한데 20년 전에 제가 경험한 것을 지금 섭식장애를 경험하는 어린아이들이 그대로 겪는다 생각하면 놓지 못하겠다.”
-3회 인식주간에선 소아·청소년 섭식장애 문제도 다룬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5월 발표한 ‘2022년 소아·청소년 정신건강 실태조사’에 따르면 청소년 섭식장애 유병률은 1.6%(소아 0.5%)로, 100명 중 1명 이상 꼴로 섭식장애를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장 동영상 공유 플랫폼만 봐도 ‘뼈말라’를 키워드로 내건 콘텐츠가 상당하다.
박 “제가 만나는 국내 의사들 말로도 최근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섭식장애가 정말 많이 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10대 초반 섭식장애 환자가 늘었다고 한다. 그런데 소아·청소년은 성인과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곧바로 현 의료시스템에서 진단을 받고 ‘섭식장애 환자로서 잘못된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겨버리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의료시스템과 학교 사이에, 섭식장애 아이들을 상담하는 선생님들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어떻게 가능할지 같이 논의해보고 싶다.”
인식주간 행사는 서울대 관악캠퍼스 최병오홀에서 열릴 예정이다. 참여 방법 등 추가 정보는 주최자인 잠수함토끼콜렉티브의 인스타그램 계정(@rabbitsubmarinecol)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