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 변소 염산 들고 누볐다…2.3조 ‘청소왕 구자관’ 성공기

2024-10-03

부엌 찬장을 열면 찹쌀떡이 가득했다. 어머니는 미국제 싱거 재봉틀을 돌렸다. 말을 타고 대문을 넘어도 어른의 머리가 지붕에 닿지 않았다. 그만큼 으리으리한 집에 살았다. 경기도 남양주 금곡에서 손에 꼽히던 부자였다.

하지만 6·25 전쟁이 모든 것을 앗아갔다. 난리 통에 인민군과 국군에게 차례로 고초를 겪었다. 금곡 구장(區長)이었던 아버지가 반강제로 인민위원장을 맡은 게 화근이었다. 서울이 수복되고 국군에 잡혀갔을 때는 이웃들이 “우리를 숨겨준 죄 밖에 없다”고 탄원을 해줘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일곱 살 소년의 눈에는, 아버지가 들것에 실려 집안으로 돌아오던 모습이 지금도 선연하게 남아 있다.

판잣집 살면서 뿔뿔이 흩어진 가족

부자 망하는 데 3년이 걸리지 않았다. 기르던 닭 3000마리가 사흘 만에 모조리 폐사했다. 당시엔 ‘닭병’이라고 불리던 조류 인플루엔자 감염이었다. 재기하겠다고 고무 공장을 차렸지만, 사기를 당하면서 한순간에 빈털터리가 됐다.

서울 미아리 하코방(판잣집)으로 이사했다. 누나는 식모살이로, 남동생은 경기도 가평 고모 집으로…. 이렇게 7남매가 뿔뿔이 흩어졌다. 입을 덜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그중 다섯째, 열한 살 구자관은 서울 광릉 외가로 보내졌다. 그래도 일요일이면 60리(약 24㎞) 길을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엄마가 보고 싶어서-.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 그는 초등학교(국민학교) 졸업장이 없다. 월사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신문 배달과 구두닦이, 아이스케키 장사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빗자루 공장에서 일하면서 야간 고등학교에 다녔다. 아침 6시에 출근했다. 그래야 일을 마치고 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래도 공부가 좋았고, 차비를 아껴 『명심보감』 사서 읽는 게 좋았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행상을 하셨어요. 자전거에 청소도구를 가득 싣고 시내를 돌며 팔았지요. 저는 부엌 한구석에서 (아버지가 내다 팔) 솔이며, 빗자루를 만들었고요. 군대에서 휴가 나와서도 일을 했다니까요. 그런데도 가난은 피할 수 없었어요.”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다. 되레 천운을 타고났다고 여겼다. 돈을 물려주지는 못했어도, 단단한 몸과 감사하는 마음을 주셨다. 사업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무실 입구에 아버지 이름과 사진을 걸었다. ‘초대 사장 구창회’라고 문구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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