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클리프 아펠이 보석의 시간과 생명의 결을 접하는 방식 [더 하이엔드]

2025-12-07

“진주는 단순한 보석이 아닙니다. 바다와 생명, 그리고 인간의 역사가 함께 길러낸 기적이죠.”

지난 9 월 찾 아간 홍 콩 레꼴 주얼리 아트 스쿨(L’ÉCOLE School of Jewelry Arts, 이하 레꼴)의 첫 수업 시간. 강의를 맡은 미술사학자 겸 레꼴 강사 마틸드 버거 롱두앙은 작은 진주 한 알에 축적된 생명성과 시간성을 설명하며 인사를 대신했다. 테이블 위를 채운 조개 껍데기와 아코야부터 콩크·멜로멜로까지 다양한 진주 표본들, 그리고 천천히 흐르는 항구의 빛까지. 그 순간 레꼴은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보석의 기원을 탐구하는 작은 연구실이자 박물관으로 변했다.

레꼴은 하이 주얼리 메종 반클리프 아펠이 2012년 설립한 주얼리 관련 교육기관이다. 예술사·과학·장인정신이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주얼리에 관련된 지식을 대중에게 전달한다. 파리에서 시작해 홍콩·도쿄·상하이·두바이 등 세계 주요 도시에 자리하며 강의와 전시, 도서 출판을 통해 ‘주얼리는 모두가 누릴 수 있는 문화’라는 철학을 확장해왔다. 미술사학자부터 보석학자, 세공사,주얼리 디자이너까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직접 수업을 맡아, 교육의 깊이와 완성도를 높여준다.

보석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

홍콩 레꼴은 자연과 공존하는 공간을 설계하는 것으로 유명한 일본 건축가 소우 후지모토가 디자인했다. 빅토리아 해안가의 빛과 곡선을 끌어와 유기적이고 자연스러운 흐름의 공간을 만들었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라운지, 밝은 조도의 실습실, 고요한 디자인 워크숍까지. 이곳에서는 배움 자체가 감각적 경험으로 확장된다.

레꼴의 다양한 클래스 중에서, 이번 방문에선 진주에 대한 미술사 강의, 주얼리 드로잉(구아슈· gouache)과 세공 워크숍을 체험해 봤다. 구아슈 특유의 투명한 질감을 다루는 드로잉 워크숍과 직접 주얼리 세공을 해보는 워크숍도 흥미로웠지만, 참가자들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단연 진주 미술사 강의였다.

강의는 먼저 조개 한 개체가 하루 200리터의 물을 정화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진주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생태계와 연결된 보석임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이어 홍콩이 ‘동방의 진주’라 불리기까지의 역사와 환경적 맥락이 더해지자, 강의는 보석학을 넘어 사회사·지리·환경사를 아우르는 깊이로 확장됐다.

이후 외투막 조직, 아가미, 진주낭, 핵 삽입 과정 등 조개의 해부 구조 설명이 이어졌다. 진주가 어떻게 성장하고 왜 색과 형태가 달라지는지 눈앞에서 퍼즐이 맞춰지듯 이해되는 시간. 아코야 진주의 지명 유래, 콩크 진주의 희귀성, 멜로멜로의 오렌지빛 광채, 피피 진주의 황금빛 매력까지 강의가 이어지며 수업은 자연과 역사, 지질학과 문화사를 넘나들었다.

직접 다양한 진주를 손에 쥐고 광택·색·형태를 기준으로 분류해보는 실습은 더욱 인상적이었다. 진주 품질판정 요소 중 하나인 광택(luster)이 손끝에서 구분되기 시작했고, 진주의 형태와 성장 환경의 연관성이 감각적으로 이해됐다. 강의를 마치며 “진주는 생명체가 만

들어낸 유일한 보석으로, 진주를 배운다는 건 곧 자연을 배운다는 의미”란 마틸드 버거 롱두앙 강사의 말은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았다.

주얼리의 문화적 깊이에 빠져들다

레꼴에서의 경험은 홍콩대학교 미술박물관에서 열린 ‘주얼리 디자인: 200년을 이어온 프랑스의 노하우(1770–1970)’ 전시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아르데코 시대의 선과 곡선, 19세기부터 축적된 200년의 프랑스 장인정신과 시대마다 변화한 디자인은 방금 전까지 조개 속 진주의 성장 과정을 들여다보던 시선을 더 깊은 주얼리의 세계로 이끌었다.

배움과 관람이 연결되면서 주얼리는 더 이상 작은 오브제가 아니라 시간이 흐르며 축적된 거대한 문화의 강처럼 느껴졌다. 레꼴의 가장 큰 매력은 주얼리를 사치품의 범주에서 꺼내 ‘지식과 감각으로 이해하는 문화’로 재정의한다는 점이다. 이곳에서 보석을 배운다는 것은 예술과 과학,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읽어내는 또다른 경험이 된다.

드로잉에서 시작된 창작의 시간

주얼리의 역사는 언제나 한 장의 드로잉에서 출발한다. 보석의 광채가 아직 실체를 갖기 전, 종이 위에서 처음 형태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지난 6~10월 홍콩대학교 미술박물관(이하 UMAG)과 레꼴 주얼리 스쿨 아시아 퍼시픽(L’ÉCOLE Asia Pacific)이 공동으로 선보인 전시 ‘주얼리 디자인: 200년을 이어온 프랑스의 노하우(1770–1970)’는 바로 그 창작의 첫 시간을 정교하게 조명했다.

레꼴의 수업을 경험한 뒤 관람한 전시는 프랑스 주얼리 메종들의 창작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해온 드로잉 아카이브를 통해, 주얼리 예술의 기원을 읽어낸 자리다. 프랑스어 ‘구아슈’라 불리는 주얼리 드로잉은 메종의 상상력이 가장 먼저 형태를 갖추는 공간이자 장인정신의 기록 흔적이다. 이번 전시는 그 200년의 흔적을 따라가며 프랑스 사부아 페어(장인정신)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기회가 됐다.

드로잉, 주얼리 디자인의 숨겨진 문헌

전시는 UMAG 관장인 플로리안 크노테와 레꼴의 장식예술 전문가 마틸드 베르제-롱두앙이 공동 큐레이션했다. 두 사람은 주얼리를 ‘과정의 예술’로 바라보며, 드로잉이 프랑스 주얼리 역사에서 수행해온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했다. 선의 흐름, 색의 밀도, 보석의 반사광까지 계산한 주얼리 드로잉은 그동안 학문적으로도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던 영역이다.

이번 전시는 반클리프 아펠 패트리모니 컬렉션, 반클리프 아펠 주얼리 컬처 펀드, 프랑스 랄리크 박물관, 홍콩 개인 소장품 컬렉션 등 여러 기관의 협력으로 완성됐다. 이를 통해 프랑스 주얼리 디자인의 기술적 연구와 미적 실험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들을 한곳에 모았다.

장인정신의 실체

전시는 총 100점의 드로잉과 13점의 주얼리 작품으로 구성됐다. 금속의 질감, 보석의 굴절, 형태의 균형을 탐구한 다양한 드로잉들은 하나의 주얼리가 탄생하기까지 어떤 사유와 계산이 필요한지를 설명했다. 1770년대 드로잉부터 1970년대 제작된 주얼리까지, 프랑스 주얼리 디자인의 200년이 드로잉이라는 형식 안에서 선명하게 이어졌다. 전시장에서 만난 레꼴 아시아 퍼시픽의 올리비에 세구라 지사장은 이번 전시에 대해 “드로잉의 역사와 그 안에 숨은 장인정신을 집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리”라 소개했다.

전시는 주얼리의 가치가 단순히 보석의 희소성과 물질성에 머무르지 않음을 보여줬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창작의 출발점, 즉 드로잉이라는 행위가 지닌 예술적·역사적 의미다. 200년의 시간은 결국 종이 위에 남은 상상력의 흔적에서 출발한다. 이번 전시는 그 시작점을 관객 앞에 펼쳐 보이며, 주얼리 디자인이라는 세계가 지닌 깊이와 아름다움을 다시 일깨웠다.

“발견하고 배우며 주얼리의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 그것이 레꼴의 핵심입니다.”

인터뷰 ㅣ 올리비에 세구라 레꼴 주얼리 스쿨 아시아 퍼시픽 지사장

올리비에 세구라 레꼴 주얼리 스쿨 아시아 퍼시픽 지사장은 ‘주얼리 디자인: 200년을 이어온 프랑스의 노하우(1770–1970)’ 전시를 공동 기획했다. 생물학·지질학·마케팅을 전공하고 GIA 감정사 자격, 풍부한 현장 경험을 갖춘 그는 프랑스 보석학 연구소 디렉터를 거쳐 레꼴의 과학 디렉터로 활동했다. 이후 2023년 아시아 퍼시픽 지사장에 부임하며 교육·전시·연구를 아우르는 레꼴의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그에게서 전시와 레꼴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전시의 기획 의도는.

“전시는 레꼴 연구 부서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 드로잉 컬렉션을 확보한 뒤 이를 단순 전시물로 둘 것인지, 아니면 드로잉 자체를 연구 대상으로 삼을 것인지 질문에서 출발했다. 드로잉은 창작의 첫 단계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그 기원과 방법론을 연구하며 이번 전시가 탄생했다.”

-드로잉에 집중한 이유는.

“방대한 드로잉을 접했을 때 단순한 감상의 차원을 넘어 그 자체를 깊이 탐구하고자 했다. 드로잉은 주얼리 창작의 시작이지만, 제작 과정의 본질을 드러내는 중요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파리의 레꼴 연구자들과 함께 원리와 역사, 기법을 분석하며 이번 전시의 방향성이 잡혔다.”

-전시를 홍콩대학교 미술박물관과 함께 연 이유는.

“K11 캠퍼스에서 전시를 이어오다가 올해 홍콩대 미술박물관과 새로운 파트너십을 구축했다. 플로리안 관장은 오랜 시간 레꼴의 연사이자 파트너였고, 대학은 ‘전승과 공유’라는 가치에서 우리와 같은 목표를 지닌 기관이다. 장식미술과 문서 전시에 강점을 가진 점도 이번 프로젝트에 적합한 이유였다.”

레꼴은 반클리프 아펠이 만든 주얼리 학교이자, 주얼리의 역사·장인정신·젬스톤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교육 플랫폼이다. 공방의 문을 열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주얼리 제작과 감정, 예술사를 일반인에게 공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으로, 파리·홍콩·상하이·두바이 등에서 세계적인 전문가들이 참여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반클리프 아펠과 레꼴의 역할은 어떻게 나뉘나.

“주얼리 공방은 특성상 외부에 개방하기 어렵다. 그래서 반클리프 아펠이 누구나 전문가를 만나고 주얼리를 발견할 수 있는 공간으로 레꼴을 만들었다. 메종 내부 교육이 아니라 대중 교육이 목적이며,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참여할 수 있는 강좌와 전시·강연·출판 등을 운영한다.”

-레꼴 교육의 핵심은.

“직접 경험하는 것이다. 다이아몬드 수업을 위해 1캐럿 이상의 스톤 20개를 준비한 것도 같은 이유다. 만지고 비교하며 배우는 경험은 어떤 설명보다 강렬하다. 반클리프 아펠의 지원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교육 현장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는지.

“파리에서 한 10대 소녀가 생일 선물로 강좌에 왔다가 주얼리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후 파리 주얼리 학교에 진학해 현재 업계에서 일하고 있다. 레꼴이 만들어내는 변화의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 감지한 주얼리 세계의 변화는.

“최근 5~10년 가장 큰 변화는 컬러 스톤의 확장이다. 가넷·투르말린·스피넬처럼 과거엔 드물었던 스톤들이 하이 주얼리에서 활발히 쓰이고 있다. 이는 창작의 폭을 크게 넓히는 흐름이다.”

-주얼리 문화를 지속시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나.

“핵심은 열정·감정·전승이다. 새로운 소재와 창의성이 새로운 대중을 끌어들이고, 이는 주얼리 세계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한국에 대한 관심도 높아 보인다. 앞으로 어떤 협업과 여정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한국의 장인정신은 프랑스와 깊게 연결된다. 우리는 이미 한국 전통 공예와 주얼리 노하우를 접목하는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서로 다른 비전이 교차할 때 훨씬 풍요로운 결과가 나온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