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즉시공과 딥페이크

2024-09-22

우리 디지털 사회에 잠재되어있는 문제점들이 지난 몇 주 동안 딥페이크 관련 기사들을 통해 충격적인 현실로 다가왔다. 인공지능 테크놀로지가 급속히 발달하면서 부작용에 대한 대처방안을 찾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딥페이크 기술의 응용은 무궁무진하여 단순한 장난에서부터 정치적인 조작과 허위정보 캠페인 등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최근 텔레그램을 이용한 영상물 조작 성범죄의 대다수에 청소년들이 연루돼 있다는 소식은 충격적이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제 우리가 접하는 모든 영상물과 이미지의 진실 여부를 의심해야 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허위 정보에 대한 불안감과 의문 제기는 항상 존재해왔다. 다름 아닌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도 우리의 이런 현실에 걸맞은 아주 흥미로운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의 하나인 에우리피데스가 쓴 『헬레나』는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삼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나가 아프로디테 여신의 농간으로 트로이 왕자 파리스와 눈이 맞아 달아났다. 그리고 헬레나를 찾아오겠다는 핑계로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와 그의 형 아가멤논이 1000척의 군함을 동원해 불멸의 트로이를 무너뜨렸다.

그런데 에우리피데스의 『헬레나』는 트로이 왕자와 달아난 여인이 헤라 여신이 마법으로 만든 허깨비 헬레나였고, 진짜 헬레나는 전쟁 10년 동안 이집트에 붙잡혀 일편단심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공상과학 같은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본질의 실체와 허상의 경계가 모호함을 꼬집은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진리가 고대 서양 문화에서도 신들의 놀음으로 해석되고 있었던 셈이다. 이렇듯 허위 정보의 역사가 유구한 만큼 상식의 도덕을 지키는 유교적 과제는 인간의 영원한 숙제일 것이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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