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서도 기존콘텐츠 대가 지급 불합리 주장 잇따라
지역특화 케이블TV ‘보완소비’ 증가 추세 기회 삼아야

[정보통신신문=박남수기자]
초고속 인터넷과 모바일 환경의 급속한 발전은 방송콘텐츠 소비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 시청자들은 OTT, IPTV, 케이블TV 등 복수의 플랫폼을 동시에 이용하며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콘텐츠를 소비하는 ‘멀티호밍(Multi-homing)’ 시대에 살고 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일반화되고 있으며 국내 유료방송 역시 구조적 전환기에 놓여 있다.
주목할 점은 멀티호밍 시청자들이 OTT나 IPTV를 활용하면서도 여전히 케이블TV를 함께 시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러 해외 연구에 따르면 멀티호밍 이용자들은 오히려 케이블TV의 시청 빈도가 높아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실시간 뉴스, 재난방송, 생활 밀착형 지역 정보 등 케이블TV만이 제공할 수 있는 콘텐츠의 공공적 특성과 지역성이 여전히 강력한 기능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양한 플랫폼이 공존하는 환경 속에서도 케이블TV는 단순한 경쟁 매체가 아닌 시청자의 콘텐츠 욕구를 보완하는 ‘보완적 소비’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해외 주요국들은 멀티호밍 시대에서 시청자 보호와 시장 경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정책적 대응에 속도를 내고 있다. 유럽연합(EU)은 디지털시장법(DMA)을 통해 플랫폼 간 전환 장벽을 제거하고 데이터 이동성을 보장함으로써 멀티호밍을 촉진하고 있으며 독일은 멀티호밍을 제한하는 배타적 계약과 독점 행위를 경쟁 제한 행위로 규정하고 사전 규제 체계를 운영 중이다. 미국과 영국 역시 시청자가 원하는 채널만 선택할 수 있는 ‘알라카르테 요금제’를 권고하고 독점적 콘텐츠 계약을 금지하는 등 시청자 권익 보호와 플랫폼 간 공정 경쟁을 유도하고 있다.
반면 국내 케이블TV 업계는 △콘텐츠 확보 비용 △재전송료 부담 △광고 수익 감소라는 삼중의 압박을 받고 있다. 특히 콘텐츠 사용료 체계는 여전히 단일 플랫폼 유통 환경을 전제로 설계돼 있어 멀티호밍이라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동일 콘텐츠가 여러 플랫폼에 공급되는 상황에서도 각 플랫폼이 각각 대가를 부담해야 하는 구조는 과도한 비용 부담을 초래하며 이는 시청자 요금 인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광고시장 또한 변화하고 있다. 콘텐츠의 중복 소비가 일반화되면서 광고주는 노출 효율 저하를 우려해 광고 단가를 낮추고 플랫폼의 수익성은 약화되고 있다. 이로 인해 콘텐츠 대가와 광고 수익 간 괴리가 커지고 있으며 이중 부담 구조 속에서 유료방송 플랫폼의 지속 가능성은 점차 위협받고 있다.
이 같은 환경 변화는 콘텐츠 대가산정 체계의 재설계를 강하게 요구한다. 멀티호밍 구조에서는 기존처럼 독점 가치를 기준으로 콘텐츠 대가를 일률적으로 산정하는 방식이 더 이상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따라서 해외에서는 ‘인크리멘털 프라이싱(Incremental Pricing)’ 원칙을 도입하고 있다. 이는 콘텐츠의 독점 소비분에만 적정 대가를 매기고 중복 소비에 대해서는 낮은 단가를 적용하는 방식이다.
실제 2023년 미국 디즈니와 차터 커뮤니케이션즈 간 협상 사례에서도 이 원칙이 반영됐다. 차터는 디즈니 콘텐츠가 OTT 등 다양한 경로로 유통되고 있음을 이유로 기존 송출료가 부당하다고 주장했고 디즈니는 일부 콘텐츠를 별도 비용 없이 제공하는 조건으로 협상을 마무리했다. 이 사례는 멀티호밍 환경에서 콘텐츠의 독점 가치가 실질적으로 낮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도 콘텐츠 소비 데이터(시청률, 광고 수익, 선호도 등)를 기반으로 한 AI 분석 시스템을 도입해 콘텐츠 대가를 합리적으로 산정하고 정부는 이를 제도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체계는 플랫폼의 부담을 줄이고 시청자 요금 인상 위험을 완화하며 미디어 시장의 공정성과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기반이 될 것이다. 또한 콘텐츠 사용료의 급등을 방지하기 위해 인상률 상한제 도입이 필요하다. 연간 인상폭을 소비자물가지수(CPI)에 일정 비율을 더한 수준으로 제한하거나, 갈등 발생 시 신속한 중재가 가능한 제도를 마련함으로써 협상 결렬에 따른 블랙아웃(방송 송출 중단) 사태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
멀티호밍 시대는 단순한 소비 패턴의 변화가 아니라 콘텐츠 유통과 가치 평가 전반을 재설계해야 하는 전환점이다. 콘텐츠 대가산정 체계 또한 이에 맞춰 구조적으로 개편되어야 하며 이는 케이블TV의 공공성과 경쟁력을 동시에 지켜내고 시청자 중심의 방송 환경을 구축하기 위한 핵심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