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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 실내 체육관 링 위, 프로레슬러 최두억(28)이 상대 선수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내리꽂는다.
“최두억! 브레인 버스터!”


그가 대표 기술을 선보이자 관중석이 떠나갈 듯 환호가 터져 나왔다. 천둥 같은 충격음에 아이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고, 어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들고 경기를 담는데 정신이 없다.


지난달 30일, (사)대한프로레슬링연맹이 고(故) 이왕표 선수 7주기를 맞아 추모 대회를 열었다. 경기에 앞서 홍상진, 김민호, 조경호 등 근육질 선수들이 무대에 올라 영정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들 가운데 최두억도 함께 했다. 일본 레슬링 유학까지 다녀온 8년 차 ‘MZ세대 레슬러’, 그는 이날 선배들의 계보를 잇는 무대에 올랐다.


그는 링 밖에서 그저 평범한 직장인이다. 퇴근길 캡 모자를 눌러쓴 모습은 여느 20대 후반 남성과 다르지 않다. 172cm 남짓한 키, 널찍한 어깨에 살집 있는 체격, 순박한 미소는 호감을 준다. 최 선수는 투잡러다. 열악한 환경의 프로레슬러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다. 그는 평택 삼성전자 협력업체에서 반도체 오·폐수 센서를 관리한다. 아침 8시에 출근해 오후 5시, 늦으면 7시 반까지 일한다. 작업복을 벗고 퇴근하면, 다시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헬스장에서 땀을 흘리거나 해외 레슬링 영상을 찾아보는 것이 퇴근 후 주된 일상이다. 잦은 부상으로 팔 하나 제대로 들기 힘든 날도 많지만, 그는 운동을 거르지 않는다. “무대에 오르려면 버텨야 해요. 게으르면 끝이죠.”

최두억이 레슬링을 택한 건 21살 여름,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린 사고 때문이었다. 밤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오토바이를 몰다 사달이 났다. 깜빡 졸다 멈춰 있던 차량을 들이받으며 하늘로 튕겨 올랐다. 천만다행으로 큰 부상은 피했지만, 완전히 망가진 오토바이를 보며 다짐했다.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자.” 어린 시절 TV 앞에서 눈을 반짝이던 순간이 떠올랐다. 헐크 호건·에디 게레로·존 시나·김일·이왕표 같은 전설들이 뛰던 링에 오른 자신을 상상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수소문 끝에 평택의 한 체육관을 찾았다. 두꺼운 매트 위에 몸을 던지고, 두들겨 맞고, 다시 일어섰다. 일주일에 두 번, 2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이 악물고 악착같이 연습에 매달린 끝에 데뷔에 성공했다. 체중도 20kg 넘게 줄였다.


고생 끝에 데뷔했지만 기쁨도 잠시. 3년 차, 정체의 벽이 그를 괴롭혔다. 기술은 늘지 않고, 경기는 제자리였다. ‘더 좋은 선수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결국 그는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일본 유학을 택했다. 한국보다 프로레슬링이 활발한 나라. 기대를 품고 도착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낡고 초라한 주차장 한쪽의 작은 링이었다. 훈련은 혹독했고, 함께 수학을 시작했던 동기 한 명은 엄격한 도제식 가르침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 이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두억은 꿋꿋하게 버텨냈다. 새로운 기술도 익혔고, 레슬링 문화와 팬들과의 교감하는 모습 등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6개월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한국 현실은 냉혹했다. 단돈 15~20만원을 받고 링에 올라 흠씬 두들겨 맞고 있는 자신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때면 자괴감 마저 몰려왔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지금이라도 그만둬야 하나. 수십 번이 아니라 수만 번 고민했죠.” 그는 솔직히 털어놨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마음도 자고 일어나면 눈 녹듯 사라졌다. 또 어김없이 체육관으로 향했다. “포기할 마음으로 며칠을 고민해 보기도 했지만, 도무지 프로레슬링 이걸 빼버리면 제가 쏟아부은 20대의 삶이 설명이 안되더라고요”



추모 대회 날 아침, 그는 다른 선수들과 함께 링 설치를 도왔다. 네 개의 기둥과 철제 프레임, 충격을 흡수하는 장치들을 직접 옮겼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표정은 밝았다. 평택 공장에서 만났을 때 표정과 달리, 반짝이는 눈빛이 오늘 이 공간의 주인공임을 증명해 보이는 듯했다.


이날 네 번째 경기에 오른 그는 본인의 레슬링 캐릭터 ‘MZ 악동’으로 변신했다. 파트너와 함께 2대2 태그매치에 나서자마자 눈빛이 돌변했다. 의도적인 반칙, 의자 공격, 장외 난투까지 서슴지 않았다. 관객들은 야유와 환호를 동시에 쏟아냈다.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링도 사회도 그렇잖아요. 저는 늘 이기고 싶을 뿐이에요.” 비록 이날 경기는 장외 판정으로 무승부가 됐지만, 관객 반응은 뜨거웠다. 화끈한 액션은 약속된 각본임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사로잡았다.



만족스럽게 경기를 마친 그는 링 아래에서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챔피언 벨트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겁니다. 박치기하면 김일 선생님이 떠오르듯이요.”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덧붙였다. “비록 주목받지 못하고 어렵고 힘들어도, 선배들과 함께 앞으로 도전할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프로레슬링을 계속 이어가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