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인문학] 윌셔 불러바드의 역설

2025-06-17

LA 코리아타운의 중심 도로중 하나가 동서로 가로지르는 윌셔 불러바드다. 다운타운의 마천루부터 코리아타운의 활기, 박물관 거리의 우아함을 지나 샌타모니카의 푸른 바다까지 이어지는 이 거리는 LA의 심장과도 같다. 화려한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이 도로가 사실은 ‘골수 사회주의자’의 이름을 땄다면 믿을 수 있을까. 역사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곳, 우리 발밑에 있다.

이 도로 이름은 1800년대 후반 부동산 개발로 유명했던 헨리 게이로드 윌셔(Henry Gaylord Wilshire)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는 1890년대 웨스트 레이크(현 맥아더 공원 근처)에 보리밭을 사서 주택단지로 개발했다. 단지 중앙을 관통하는 폭 4미터 정도의 길을 내고 자신의 땅을 시에 기부하는 조건으로 단 하나를 요구했다. 바로 그 길에 자신의 이름 ‘윌셔’를 붙여달라는 것이었다. 보리밭 사이로 난 작은 길은 훗날 LA의 동서를 잇는 대동맥으로 성장했지만, 그 이름 뒤에 숨겨진 윌셔의 진짜 꿈은 따로 있었다.

그의 삶은 한마디로 역설이었다. 윌셔는 1860년 6월6일(다른 자료는 1861년에 출생 주장)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그는 곧 LA로 이주해 24살 나이에 사업을 시작했고, 서른이 될 즈음 상당한 돈을 벌었다.

막대한 부를 쌓은 자본가였지만 그의 신념은 부의 축적이 아닌 부의 철폐를 외치는 사회주의에 있었다.

그는 그는 캘리포니아, 뉴욕, 영국, 캐나다 등 삶의 터전을 옮길 때마다 사회주의 후보로 선거에 출마했다. 번번이 낙선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윌셔의 삶을 연구한 캘리포니아 역사가 케빈 스타에 의하면 윌셔의 이름은 LA(Wilshire Boulevard), 풀러턴(Wilshire Avenue), 애리조나 피닉스(Wilshire Drive)에서 각각 도로이름으로 사용 중이다. LA 윌셔와 켄모어 코너에 있는 게이로드 아파트는 윌셔의 미들네임을 딴 빌딩이다. 이 건물은 1924년에 당시 최고급 호텔로 개관했고 아파트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윌셔는 부동산 개발업, 광산업, 건강산업, 전기산업 등 다양한 사업에 손을 댔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무기는 ‘출판’이었다. 1900년에 ‘윌셔 출판사(The Wilshire Book Company)’를 열었다. 윌셔는 이 출판사에서 자신의 책을 두 권 출판했는데 그중 하나가 자신이 발행한 잡지 사설들을 모은 책이다. 요컨대 사회운동의 설명하고 선전하는 글 모음집이다.

윌셔가 발간한 잡지는 ‘도전(the Challenge)’이다. 나중에 ‘윌셔 매거진(Wilshire Magazine)’으로 개칭한 이 잡지는 사회주의 운동을 선전하는 잡지였다. 미국 내 발행이 법적으로 어려워지자, 캐나다로 옮겨서 발행하는 열성을 보였는데 한때는 42만5000부를 발행하는 굴지의 잡지가 되었고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 운동 잡지였다.

이처럼 부동산과 광업, 출판을 넘나들며 부를 쌓는 동시에, 그 부를 기반으로 자본주의의 심장을 겨눈 혁명가를 꿈꿨던 윌셔. 하지만 그의 말로는 초라했다. 왕성한 활동으로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듯 보였던 그는 1927년 9월, 뉴욕에서 빈털터리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지난 6일은 윌셔가 태어난 지 160년 되는 날이었다. 그가 남긴 윌셔 불러바드에는 그가 타도하고자 했던 자본주의의 활기가 그 어느 때보다 넘실댄다. 한인들의 성공 신화가 쓰이고, 세계적인 기업들의 로고가 번쩍이며, 할리우드 스타들의 차량이 거리를 메운다.

윌셔 불러바드를 걸으며 인생을 생각한다.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인생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붙잡아야 할까.

강태광 / 월드쉐어USA 대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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