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에 맞선 80년 광주, '민주주의' 대명사 되다 [창간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 ㉒]

2025-08-19

대한민국 '트리거 60' ㉒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0년 5월, 전국 대학가는 전두환 신군부에 대한 반대 시위로 달아올랐다. 5월 15일 서울역에 30개 대학에서 10만여 명의 대학생이 모일 정도로 시위 규모는 커졌다. 하지만 시위 지도부는 이날 서울역에서 해산을 결정했다. 일명 ‘서울역 회군’이다.

신군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서울 중앙청에서 임시국무회의가 열리던 16일 오후, 무장 군인 600여 명이 회의장 안팎에 배치됐다. 중앙청의 전화선은 모두 차단됐다. 국무위원들은 헌병들의 안내에 따라 회의장에 입장했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주영복(2005년 별세)조차도 훗날 회고록에서 “(회의장에) 들어가는데 다리가 떨렸다”고 할 만큼 위압적인 분위기였다.

이날 국무회의에선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의결했다. 안건 상정부터 결정까지 걸린 시간은 단 8분. 계엄 당국은 정당 및 정치활동 금지, 국회 폐쇄 등의 조치를 내리고, 영장 없이 2600여 명을 구금했다. 김대중은 자택에서 체포돼 연행됐다. 김영삼과 김종필도 각각 가택연금과 보안사 감금 조치를 당했다. 또 이날 저녁 서울 이화여대에서 열린 대학생 지도부 회의에 참석한 학생운동 간부들도 모두 체포됐다. 학생 시위의 동력을 원천 차단하려는 조치였다.

한편 광주에선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도청 일대에서 ‘민주화 대성회’라는 시국 성토대회가 열렸다. 전남대·조선대·광주교대 등 대학생 2만여 명이 전두환 퇴진, 민주화 쟁취 궐기대회에 나섰다. 대학교수 50여 명도 시가행진의 선두에 서서 학생들과 뜻을 함께했다. 5월 18일 계엄령 전국 확대 소식이 전해지자 학생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사전에 행동지침을 공유한 학생 수백 명이 캠퍼스 앞에 모여 시위를 시작했다. 7개월 전 야당 지도자인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한 후 시작된 ‘부마항쟁’을 신군부는 기억하고 있었다. 광주 대학가의 학생 시위를 조기에 해산하지 않으면 사태가 커질 것을 우려했다. 시위 초기부터 공수부대를 투입해 강력 진압에 나선 이유였다.

비극으로 끝난 열흘간의 시민 저항

5월 21일 도청 앞에서 시위대를 향한 계엄군의 집단발포 사건이 터졌다. 시민 수십 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계엄군은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닥쳐 광주 장악에 실패하고 외곽으로 물러났다. 광주시내는 평온을 되찾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광주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도청으로 모여주세요.”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시민군의 마지막 방송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우릴 잊지 말아 주세요.” 얼마 뒤 계엄군이 광주시내로 진입했다. 광주의 저항은 그렇게 끝났다. 10일 동안(5월 18~27일) 사망자 166명, 실종자 179명, 부상자는 2000명 이상이었다(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공식 기록).

왜 하필 광주였을까. 5월 15일 ‘서울역 회군’과 이후 학생 지도부 체포 사태 속에서도 광주의 학생운동 조직은 상대적으로 건재해 시위 동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야당과 호남 정치의 상징인 김대중의 체포 소식은 학생들의 반감을 더 키웠다. 당시 호남 지역 교육의 메카였던 광주는 ‘학생들의 도시’였다. 광주 인구 80여 만 명 중 14%에 육박하는 11만 명이 고교생과 대학생이었다. 이들은 5·18의 중심 세력이었다. 또 당시 광주·전남 지역 인구의 95%는 이 지역 출신이었다. 타 지역으로부터의 전입자가 적다 보니 지역민 간의 공동체적 결속력이 유달리 강한 측면도 있었다. 박정희 정부 때부터 호남 차별과 소외에 대한 불만도 누적된 상태였다. 직접 불을 지른 것은 초기부터 투입된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 방식이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그 명예를 찾고 진실을 규명하기까지 우리 사회는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광주 시민들에게 덧씌워진 ‘폭도’라는 주홍글씨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80~9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선 ‘광주 5·18’은 금기 단어였다. 5·18에 대한 시민들의 증언을 담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1985)는 대학가에서 ‘지하 베스트셀러’였다. 대학생들은 어둠의 경로로 전파된 5·18 비디오를 몰래 보며 그날의 진실을 알게 됐다. 5·18 과거사 규명 과정에서도 홍역을 치렀다. 1988년 국회에서 ‘광주 청문회’가 열렸지만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들은 증언을 거부하거나 허위 사실을 대놓고 내세웠다. 5·18 당시 헬기 사격 문제도 논란이 컸다. 2018년 국방부 5·18 특별조사위원회가 5개월간 조사한 끝에 “계엄군에 의한 헬기 사격은 존재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법원도 국과수 감정 결과 등을 바탕으로 “헬기 사격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문민정부 출범 후 5·18 명예회복 노력을 계속해 온 점은 그나마 다행이다. 신군부의 권력찬탈에 대해 검찰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서 사법적 판단 대상이 될 수 없다”며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렸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김영삼 대통령은 ‘5·18 특별법 제정’이라는 결단을 내려 신군부의 권력찬탈 행위를 처벌할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어 1997년 정부는 5·18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진영에 따라 광주사태 또는 광주항쟁으로 불리던 5·18의 명칭도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법적·제도적으로 5·18은 명예를 회복했다. 대통령의 5·18 기념식 참석도 이뤄졌다.

유네스코 “아시아 민주화에 기여” 평가

광주의 서사는 대중문화·예술 분야를 통해 살아났다. 영화 ‘화려한 휴가’(2007)는 집단발포와 도청 진압까지의 과정을 대중적 스케일로 복원해 기억을 되살렸다. ‘택시운전사’(2017)는 ‘푸른 눈의 목격자’로 불린 독일 기자 힌츠페터의 시선을 통해 봉쇄된 도시의 ‘진실’이 외부로 알려지게 된 경로를 그렸다. 지난해 『소년이 온다』의 작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5·18은 다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한강은 “광주가 더 이상 특정 도시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공존하는 보편적 공간을 의미하는 보통명사가 됐다”고 말했다.

5·18은 우리 사회에 무엇을 남겼을까. 4·19혁명이 ‘민간 독재’를 종식했다면, 5·18은 ‘군부독재’ 퇴진의 시발점이 된 저항운동이었다. 훗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5·18은 유사한 독재정치의 경험을 한 아시아 등 여러 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2011년 유네스코가 5·18 기록물을 인권 분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 이유다. 유네스코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아시아 민주화와 냉전구조 해체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군의 정치적 중립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돌아보게 한다. 지난해 12·3 비상계엄사태 때 국회 등에 출동한 계엄군은 상부의 지시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거나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5월 광주에서의 교훈과도 무관하지 않다. 정치적으로 해결하여야 할 사안을 통수권을 빙자해 군을 동원하는 것은 비극을 불러온다는 교훈을 새겨야 한다.

최근엔 헌법 전문에 5·18 정신을 담자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여야 모두 “국민통합의 계기로 삼자”고 했다. 5·18의 아픔을 화합의 촉매제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목소리는 예전부터 나왔다. 83년 3월, 망명객 김대중은 미국 필라델피아의 템플대에서 ‘민중의 한과 우리 세대의 사명’을 주제로 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중의 한은 원한이 아니므로 복수로써 풀리지 않는다. 광주의 한을 푸는 것은 똑같이 보복하는 것이 아니다. (중략) 민주주의와 인권의 성취 그리고 화해와 통합을 이루는 것이다”

5·18은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시험지다. 여야는 정치적 이해를 떠나 보편적 역사성을 지닌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과거는 현재를, 현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 45년 전 5·18을 2025년 5·18로 되새김하는 이유다.

창간 60주년 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은 아래 링크를 통해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은 ‘국토 대동맥 경부고속도로’ 편입니다.

양병기 청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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