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유엔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기후위기에 “즐겁고(fun) 멋지게(cool), 섹시하게(sexy)” 대응하겠다고 말했다가 조롱당해온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농림수산상에 대한 여론이 뒤집히고 있다. 고이즈미 농림상은 1년 만에 쌀값이 두 배 가까이 폭등한 ‘레이와(나루히토 일왕 연호)의 쌀 소동’으로 시민들이 고통받는 가운데 과감하게 쌀 유통 정책을 진두지휘하며 유력한 차기 총리감으로 거론되고 있다.
고이즈미 농림상은 “집에 쌀이 넘친다”는 취지의 망언을 하며 경질된 에토 다쿠 전 농림상의 후임으로 지난달 21일 취임했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5kg에 4200엔(약 3만9700원)대였던 쌀값을 3000엔(약 2만8300원)대까지 내려야 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고이즈미 농림상은 취임 이틀 만에 급진적인 대책을 내놓았다. 소매점에 수의계약 형식으로 파는 비축미 분량을 대폭 늘릴 것이라고 공언했다. 비축미 소매가 목표는 5kg 기준 2000엔(약 1만8900원)으로 잡았다.
그간 일본 정부는 비축미 대부분을 한국의 농협과 유사한 전일본농업협동조합연합회(JA·전농)와 도매상에게 경쟁 입찰 방식으로 판매했다. 그러나 지난 3월부터 세 차례에 걸쳐 비축미 61만t을 풀어도 쌀값이 잡히지 않자 ‘도매상이 쌀을 사재기하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는 여론이 일었다. 이 가운데 농림성은 지난 10일 추가 방출 비축미 20만t 중 50%를 소매점에 수의계약 형태로 우선 배분했다.
고이즈미 농림상 취임 전후 쌀 소매 가격은 내려갔다. 농림성은 지난달 26일부터 일주일간 슈퍼 1000곳에서 판매된 쌀 5㎏ 평균 가격을 전주 대비 0.9% 떨어진 4223엔(약 3만9900원)으로 집계했다. 아사히신문은 2주 연속 쌀값이 떨어진 것은 지난해 11월 이후 처음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해당 통계에는 고이즈미 농림상이 추진한 소매점 수의계약 영향이 포함되진 않았다.
비축미 소매 직거래 정책의 효과가 뚜렷하게 검증되지 않았음에도 고이즈미 농림상은 일본 시민 사이에서 호평을 얻고 있다. 정치인, 관료, 이익단체의 카르텔인 이른바 ‘철의 트라이앵글’을 겨냥한 발언 때문이다.
전농과 쌀 생산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민당의 이른바 ‘농림족’ 의원들은 “고이즈미 농림상이 당과 협의 없이 독단적으로 쌀 정책을 결정한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고이즈미 농림상은 “당내 동의를 얻어야 했다면 소비자들은 값싼 비축미를 (이렇게 빨리) 점포에서 사지 못했을 것”이라며 맞받아쳤다.
그는 지난 9일 보도된 일본 주간지 주간현대와의 인터뷰에서도 “생산자 단체나 전농 등 기득권에만 신경 쓰느라 소비자를 경시했다”며 서슴없이 당정을 비판했다.
고이즈미 농수상은 자민당 내 무계파로 비주류이기 때문에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부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뜻에 따라 탈계파 정치를 강조해왔다.
그는 이전부터 농정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왔다. 2016년 자민당 농림부 회장직을 맡았을 당시에는 전농의 농자재 유통 독점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고 밝혔다가 “시장주의자”라며 역풍을 맞았다. 많은 농가는 농자재 가격 협상력을 높이고 농자잿값을 안정화하기 위해 전농을 통해 비료, 농약, 종자 등을 공동구매하고 있다.
지난 5일 중의원(하원) 농림수산위원회 회의에선 “다른 식료품과 달리 쌀 유통 구조는 지나치게 복잡하다”며 “어느 도매상의 영업이익은 전년보다 500% 늘기도 했다”며 쌀 유통 개혁의 필요성을 말했다.
주간현대는 그를 ‘구세주’라고 표현하며 “잘하면 최유력 차기 총리 후보로 부상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지통신은 “몰락 직전의 이시바라는 성(城)에 고이즈미라는 무기가 등장했다”고 평가했다. 고이즈미 농림상은 지난해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총리와 경합했다가 패배했다.
농산물 가격을 낮추는 데에만 집중하는 고이즈미 농림상의 정책이 장기적으로 국내 농가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특히 농림성은 쌀 수입량을 대폭 늘리는 안을 고려하고 있는데, 수입쌀이 많아지면 국산 쌀 가격이 대폭 하락하고, 국산 쌀의 시장 점유율이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집단행동으로 농산물 가격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전농의 조직력을 약화하면 농산물 가격 편차가 심해지는 부작용도 생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