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홈페이지에서 사라진 스페인어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01-21

2016년 3월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이웃나라 쿠바의 코미디 프로그램에 깜짝 출연한 적이 있다. 진행자는 쿠바와 미국의 야구 시합이 열리는 날의 날씨가 궁금하다며 “카사블랑카의 기상 당국에 문의하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카사블랑카 하면 모로코 제1의 도시부터 떠올리기 쉬운데 쿠바 수도 아바나 인근에도 카사블랑카라는 곳이 있다. 진행자가 카사블랑카 기상 당국에 전화를 걸자 뜻밖에도 오바마가 받았다. 그러면서 “여기가 바로 백악관”이라고 했다. 스페인어 카사블랑카(Casa Blanca)는 ‘하얀 집’이란 뜻이다. 영어로 하면 ‘화이트하우스’(White House), 곧 백악관이라는 점에 착안한 일종의 언어유희인 셈이다.

스페인어는 미국에서 영어 다음으로 널리 쓰이는 언어다. 오늘날 3억40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 미국 인구 가운데 약 5분의 1이 히스패닉·라틴계 주민이기 때문이다. 미국 내 스페인어 사용자들은 스페인어권 국가인 멕시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캘리포니아, 텍사스,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의 주(州)에 특히 많이 산다. 물론 이들 주에서 스페인어가 영어와 대등한 공용어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관공서 서류나 주민들에게 보내는 공문 등에 영어와 스페인어를 병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로스앤젤레스(LA)에 오래 거주한 경험이 있는 어느 한국인은 “주변에서 영어보다 스페인어가 들릴 때가 더 많았다”고 회상했다.

2024년 11월 당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 정상회의 참석차 페루 수도 리마를 방문했다. 그는 디나 볼루아르테 페루 대통령과의 양자 정상회담 결과를 언론에 설명하는 도중 갑자기 스페인어에 얽힌 사연을 소개했다. 자신이 젊은 상원의원이던 시절 (스페인어가 널리 쓰이는) 텍사스 출신의 선배 상원의원으로부터 “당신, 언젠가 대선에 출마하게 될 수 있으니 스페인어를 배우는 게 좋을 것”이란 조언을 들었다는 것이다. 바이든은 “하지만 난 영어밖에 할 줄 모른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선배의 충고대로 스페인어를 공부했다면 정치인으로서 더 큰 성공을 거뒀을 것이란 후회의 의미로 풀이된다.

지난 20일 도널드 트럼프 새 미국 대통령 취임과 더불어 백악관 홈페이지도 확 개편됐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스페인어 서비스가 사라진 점이다. 바이든은 비록 본인은 스페인어를 하지 못했으나 히스패닉·라틴계 유권자를 의식해 백악관의 모든 발표 내용을 스페인어로 번역해 알리도록 했다. 이는 오바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트럼프는 2017년 1월 처음 대통령이 됐을 때는 물론 이번에도 백악관 홈페이지의 스페인어 서비스부터 먼저 없애도록 했다. 미국에서 살거나 미국에 관해 알고 싶으면 반드시 영어부터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고압적인 태도가 느껴진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아래에선 언어 분야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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