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시대…계산 복잡해진 K반도체·배터리

2025-03-16

[주간경향] “반도체법(CHIPS Act)은 돈을 낭비하는 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월 7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 집무실에서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 내에 제조시설을 세우면 미국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이 법을 없애겠다는 취지였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의회 합동회의 연설에서도 “형편없는 법”이라며 폐지하고 남은 예산을 부채 감축 등 다른 곳에 써야 한다고 했다. 반도체에 고율의 관세를 매기면 해외 반도체 기업들이 관세를 피해 미국 내에 생산기지를 지으려 할 텐데 굳이 이들에게 돈을 쥐여줄 필요가 있냐는 얘기다. 트럼프는 반도체에 최소 25% 관세를 매기겠다고도 했다.

반도체법 지원금을 받아 미국에 제조시설을 짓기로 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은 향후 투자 계획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대만의 반도체 회사인 TSMC가 미국에 총 1000억달러(약 145조원)를 추가로 투자한다는 계획을 발표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도체만이 아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전임 바이든 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역시 폐기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IRA는 미국에서 생산한 전기차를 구매한 소비자에게 세액공제 방식으로 보조금을 지급해 전기차 구매 부담을 줄여주는 법이다. 이 법은 전기차와 배터리, 태양광 등 친환경 제품·설비를 생산한 업체에도 보조금을 준다. 이에 미국에서 배터리 공장을 운영하는 한국 배터리 업체들도 IRA 폐지 방침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한국 반도체와 배터리는 트럼프 시대를 맞아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할까. 기회는 없을까.

“주도권 이어가려면 미국과 협력해야”

반도체는 글로벌 자유무역 질서의 수혜를 입은 품목이다. 지난 30년간 반도체에는 사실상 관세가 붙지 않았다. 1996년 체결된 세계무역기구(WTO)의 정보기술협정(ITA) 덕분이다. ITA에 참여하는 국가들은 반도체, 스마트폰, 컴퓨터 등 IT 부품·제품 등에 0% 관세를 적용한다. IT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관련 산업이 활성화한 것은 이 같은 다자무역 환경이 조성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ITA에는 한국, 미국, 중국, 유럽연합(EU), 일본 등 80개국 이상이 참여하고 있다.

주요 국가들은 글로벌 공급망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내며 반도체와 IT 산업을 키웠다. 예컨대 애플 아이폰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보자. 시스템 반도체인 ‘모바일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는 영국의 ARM으로부터 기본 설계 도면이라 할 수 있는 설계자산(IP)을 받아 만든다. 미국 기업인 시놉시스와 케이던스의 설계자동화프로그램(EDA)을 활용해 설계된다. 애플은 대만의 TSMC에 모바일 AP 위탁생산을 맡기고, TSMC는 네덜란드, 미국, 일본의 장비를 써서 이를 제조한다. 아이폰에는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생산한 메모리 반도체도 들어간다. 모바일 AP와 메모리 반도체 등은 대만 폭스콘의 중국 공장에서 아이폰에 탑재된다. 몇 년 전부터는 중국의 반도체 제조기술이 상당히 올라오면서 아이폰에 중국산 메모리 반도체가 들어가는 것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다. 반도체 산업의 주요 플레이어는 미국, 유럽, 일본, 한국, 중국, 대만 등이다.

ITA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트럼프 1기 행정부 때였다. 미국은 2018년 국가 안보 등을 이유로 중국산 반도체에 25% 관세를 적용했다. 중국도 미국산 제품에 대해 보복관세로 대응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미국과 동맹국 중심으로 재편하려던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도 2024년 5월 중국산 반도체 관세율을 50%로 높였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은 이제 두 축으로 나뉘고 있다. 한 축은 미국과 동맹국, 다른 한 축은 중국. 한국은 미국을 축으로 하는 반도체 공급망에서 주요 역할을 맡게 됐다. 반도체법 지원금을 받는 조건으로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짓기 시작했고, SK하이닉스는 미국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 고대역폭메모리(HBM)용 첨단 후공정(패키징)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반도체법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트럼프 대통령은 폐지를 주장하지만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 내에서도 반발이 커 폐지가 쉽지 않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의 의회 합동회의 연설 직후, 공화당 상원의원인 토드 영은 “반도체법은 우리 시대 가장 큰 성공 중의 하나”라며 반도체법 폐지에 반대했다. 그는 SK하이닉스가 패키징 공장을 짓기로 한 인디애나주 상원의원이다. 삼성전자 공장이 들어서는 텍사스주의 존 코닌 상원의원(공화당)은 “트럼프 대통령은 텍사스와 미국 제조업의 성공을 위해 반도체법 강화에 집중해야 한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이외에도 TSMC와 인텔의 공장이 들어서는 애리조나주의 마크 켈리 상원의원(민주당), 국가반도체기술센터(NSTC)가 들어서기로 한 뉴욕주의 척 슈머 상원의원(민주당) 등 반도체법의 수혜를 입은 지역의 의원들이 폐지를 반대한다.

다만 보조금이 줄어들 여지는 있다. 이에 대해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투자 계획에 따라서 보조금이 정해졌는데, 미국 정부가 약속한 보조금이 줄면 우리 기업의 투자 계획도 축소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도 “보조금을 못 받을까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면서 “우리도 투자를 줄이겠다며 강하게 나가면 된다”고 했다. 그는 “트럼프의 말에 우리가 너무 휘둘릴 필요까지는 없다. 한국에도 협상카드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보조금 축소에 따라 투자 계획 등을 줄이는 경우 오히려 장기적으로 한국 반도체에 불리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한국이 투자 계획을 조정하는 움직임을 보일 경우, 미국 정부가 한국을 ‘협력 국가’가 아닌 ‘관심 국가’로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과 기술협력을 할 때 제한을 받는 국가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나중에 기술 표준을 제정하거나 신기술을 만드는 과정에서 큰 애로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권 교수는 “미국은 반도체·인공지능(AI)을 포함한 다양한 전략 기술 생태계를 자국 안에 만들려고 할 것이고, 일부는 한국이나 일본, 대만에 일종의 아웃소싱을 주는 개념으로 처리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 파트너십 제안이 한국에게 올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반도체에 관세 25%를 부과하면 한국 반도체 기업에 타격은 없을까. 미국이 수입하는 반도체 중 한국산은 7% 수준이다. 관세 부과로 인한 영향은 있겠지만 큰 타격은 아닐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산 반도체 비중이 7%에 불과한 것은 한국산 반도체는 주로 D램과 낸드 같은 메모리 반도체이고, 이들 메모리는 주로 다른 국가에서 조립돼 완제품의 형태로 미국 시장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예컨대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에 탑재되는 SK하이닉스의 HBM은 대만으로 가 TSMC 공장에서 엔비디아의 GPU와 함께 패키징 되기 때문에 미국 수입 통계에서 빠진다. 미국의 메모리 업체인 마이크론이 미국 현지에서 메모리를 생산하는 경우, 미국 시장에서 한국 메모리 대비 가격 경쟁력이 높아질 수는 있다. 하지만 마이크론 역시 생산 공장의 대부분이 일본, 대만 등 해외에 있다.

“배터리는 시간 벌게 될 것”

배터리와 전기차 등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내용의 IRA 역시 폐지가 쉽지 않다. IRA로 기업들의 투자를 유치한 애리조나, 네바다 등을 지역구로 둔 공화당 소속 의원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전문가들은 폐지보다는 대통령 행정명령 등을 통한 일부 내용의 변경이 유력하다고 말한다.

최재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중국 기업에 다소 열려 있던 기존 조항들이 삭제되거나 수정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예컨대 IRA에서는 미국에 투자하는 중국 배터리업체 등에도 각종 세액공제 혜택이 적용됐다. 첨단 제조 세액공제(45X 조항), 투자세액공제(48C), 상업용 친환경차 세액공제(45W) 등에 대해 해외우려집단(FEOC) 요건을 적용해 중국 기업을 완전히 배제할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익명의 업계 관계자는 “미국에 투자하는 중국 배터리 업체 CATL이 세액공제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끔 IRA 관련 조항이 일부 변경된다면 한국 기업에 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현익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도 “트럼프는 이전 정부 이상으로 중국을 견제 대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배터리 분야에서도 중국을 견제하려 할 것”이라며 “2차 전지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 밀리는 구도가 형성되고 있었는데, 시간을 좀 벌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IRA는 배터리 핵심 광물을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에서 가공할 경우, 해당 배터리를 채택한 미국산 전기차를 보조금 지급 대상이 되도록 했다. 이에 중국 기업들은 한국 기업과 합작으로 새만금 등에 전구체·양극재 공장을 짓는 양해각서(MOU) 등을 체결하기도 했다. 일종의 우회로를 확보한 셈이다. 하지만 트럼프 시대의 IRA는 이런 합작을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현익 부연구위원은 “이제 대중국 규제는 어떤 형태로든 강화되는 추세이기 때문에 국내 배터리 기업들도 중국과 합작하는 걸 상당히 위험한 일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며 “이런 추세는 트럼프 이후에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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